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한국 법원의 판결까지도
중재소송의 대상이 된다
중재소송의 대상이 된다
판사들이 잇달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판하는 것을 두고 법원 안에는 동의하는 이들 못지않게 못마땅해하는 목소리도 있다. 사법부의 법관들이 행정부의 일인 외교협상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거나, 판사들이 정치 쟁점에 끼어드는 것은 신중치 않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표현이 과하다는 사람도 있고, 문제점 지적엔 공감하면서도 그 방식에 대해선 ‘오버 아니냐’는 이도 있다. 사법부가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 자체가 마뜩잖다는 이들도 물론 있다.
현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민주사회에선 당연한 일인 것처럼, 그 반대론에 대한 다양한 반응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런 반응에 깔린 생각, 예컨대 사법소극주의는 여러 세대의 역사적 경험과 고민의 산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설령 마땅치 않더라도 외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 문제가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법부로선 지금의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바로 그런 일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사법부 자신의 일이다. 당장,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도입으로 헌법과 기존의 법률 운용체계의 변경을 강요당하게 된다. 예컨대 우리 헌법 제23조는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해야 하며, 재산권의 제한과 보상 등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산권 행사 등도 공익과 비교해서 어떤 것이 더 큰가, 즉 ‘비교형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선 공공목적을 위한 정부의 규제로 미국 투자자가 애초 기대했던 경제적 이익에 간접적으로라도 피해를 입게 되면 보상입법이 아니라 ‘국제 관습법의 기준에 따라’, ‘완전한 현금화가 가능하도록 지체없는 지급’을 요구하는 소송을 국제중재법정에 낼 수 있다. 외국 투자자의 재산적 이익은 훨씬 폭넓게 보호받는다. 공익과 사익을 비교한다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터에 한국의 법원이 기존의 규제법학에 맞춘 해석을 하다가는 판결까지도 중재소송의 대상이 된다.
국내 기관 등이 당사자가 되는 재판의 관할권을 국내 법원 대신 공정성과 투명성이 의심되는 제3의 기구가 갖는 것도 작은 문제가 아니다. 국제중재법정은 투자자와 미국 정부 등이 각각 지명하는 세 명의 중재인으로 구성된다. 그 결정은 단심제이고, 국내법보다 우월하다. 이렇게 되면 법률가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법적 안정성은 자칫 근본부터 위협받을 수 있다.
따지자면 이는 우리 사법체계의 굴욕이다. 미국이 1988년 캐나다와의 에프티에이에는 없던 이 제도를 1994년 캐나다·멕시코와의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에 포함한 것은 멕시코의 법체계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한다. 2004년 미국-오스트레일리아 자유무역협정에서 이 제도가 빠진 이유에 대한 공식 설명도 “두 나라가 보통법 국가로서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보호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결정엔 투자 규모나 법률적 경험 등이 만만찮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캐나다처럼 미국을 상대로 대거 중재소송을 걸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결국 한국은 ‘법률 문명국’의 기준에 모자란다고 보였거나, 혹은 만만하게 보인 셈이다. 실제로 투자자-국가 소송이 90년대 전반기에 견줘 10년 만에 10배 이상 늘어나는 동안 미국은 진 경우가 별로 없다.
그리 보면 지금 판사들의 발언은 만시지탄이다. “뼛속까지 친미 정권” 탓이라는 따위의 표현도 지나치게 점잖아 보인다. 이 정도 일이라면 대법원이 나서야 한다. 지금 와서도 억지로 덮으려 든다면 머지않아 더 큰 화를 불러오게 된다. 판사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대법원이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논의의 장을 마련해 때를 놓치지 않기 바란다. 따져보면 나중에 뒤늦게 비명을 지를 분야가 어디 사법부뿐이겠는가.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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