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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비상사태’의 허와 실 / 김종구

등록 2011-12-20 19:18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정부의 태도가 믿음직스럽기보다는
졸지에 허를 찔린 뒤 허둥지둥
법석을 떤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뒤 모든 정부기관이 바빠졌다.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고, 공무원들도 모두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경찰은 비상경계령으로도 부족해 서울 등 수도권 4개 시·도의 경찰청과 일선 경찰서에는 이보다 한단계 높은 ‘병호 비상’을 발령했다.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매우 당연하고도 적절한 조처로 보인다. 북한의 돌출행동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는 일은 정부의 마땅한 책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처지에서는 뭔가 맥이 빠지는 느낌을 금하기 어렵다. 정부의 태도가 믿음직스럽기보다는 졸지에 허를 찔린 뒤 허둥지둥 법석을 떤다는 느낌마저 든다. 마치 빈 수레의 요란함이라고나 할까.

역설적이지만 한반도는 북한이 상을 치르고 있는 지금 가장 안온한 시기를 맞고 있다. “아직까지 북한군의 특이한 동향이 없다”는 군 당국의 발표는 그래서 전혀 놀랍지도 새삼스럽지도 않다. 군의 이런 발표에 많은 국민들은 안도감보다는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부 당국자들은 “미리 준비된 매뉴얼대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문 문제, 중국과의 협조 등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면 제대로 된 매뉴얼이 존재하는지부터 의심스럽다. 사실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은 시기상의 문제였을 뿐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그의 죽음 이후 새롭게 전개될 북한 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정책적 매뉴얼을 준비해놓았는지는 무척 의문이다. 군경의 비상근무 정도가 매뉴얼의 전부라면 너무 초라해 보인다.

정부 당국자들이 말끝마다 “북한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하나 마나 한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별로 탐탁지 않다. 이번에 보니 우리 정부의 정보 수집력이나 상황판단 능력은 거의 낙제점 수준이었다. 북한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서야 김 위원장의 사망 사실을 알기는 정보기관 관계자들이나 일반 시민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능력과 감각으로 북한 상황을 어떻게 예의 주시하겠다는 것인지, 주시하면 정확히 상황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확한 정보도 없이 막연한 시나리오에 의존하는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과거의 예를 보면 정부 당국의 ‘경계’와 ‘예의 주시’는 북쪽보다 오히려 남쪽 내부를 향한 경우도 많았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남한 사회에 몰아쳤던 공안 한파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번에 검찰의 공안 파트가 곧바로 비상근무에 들어간 것도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그때처럼 어마어마한 조직사건은 아니더라도 국가보안법을 동원한 크고 작은 공안사건이 잇따를 가능성은 충분하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 대통령만큼 운이 좋은 사람도 드물 것 같다.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으로 이 대통령은 일단 사면초가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디도스 사건, 이상득 의원 비리 의혹 등 청와대를 둘러싼 온갖 악재들이 일단 물밑으로 잠복했다. 외교안보 문제로 대통령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레임덕 현상의 완화라는 덤도 얻었다.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 이후 위기감이 증폭되면서 당시 한나라당에서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박근혜 의원을 앞서기 시작했던 점을 되돌아보면 김정일 위원장은 이 대통령에게는 여러모로 구원투수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 위원장의 죽음이 우리 앞에 놓인 여러 현안을 모조리 쓸어갈 쓰나미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남한 국민들이 모두 비상사태에 들어간다고 해서 북한의 체제가 조속히 안정되는 것도 아니다. 정부의 분위기 띄우기를 경계해야 할 이유다. 이제 ‘비상’에서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할 때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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