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사상의 옹호자이자 실용주의 이념의 혁신자인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1931~2007)는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라는 용어로 우리 시대를 설명한 바 있다. 마지막 어휘란 개인 혹은 집단이 최후까지 의지하는 신념어를 가리킨다. 그 어휘를 가슴에 품고 우리는 벗을 가까이하고 적을 미워하며, 그 어휘를 거울로 삼아 자기를 성찰하고 미래를 기획한다. 작은 영역에서 그 어휘는 진실·정직·아름다움 같은 말로 나타나며, 더 큰 영역에서는 진보·자유·신·조국 같은 말이 마지막 어휘를 구성한다. 마지막 어휘는 보통 의식 아래 있다가 삶이 흔들릴 때 표면 위로 솟아오른다. 죽음 앞의 한마디에 마지막 어휘가 실리기도 한다.
얼마 전 이 험한 시대를 벗들에게 맡기고 떠난 김근태의 마지막 어휘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민주주의였을 것이다. 그가 쓰러지는 순간까지 맞서 싸웠던 민주주의의 안태고니스트들, 이 나라 수구보수세력들의 마지막 어휘는 무엇일까. 보수라는 단어를 버리느니 마느니 하는 걸 보면 보수가 마지막 어휘는 아닌 듯하다. 지난 수십 년, 특히 지난 몇 년 동안 이 땅의 수구보수세력이 보여준 바로 짐작하건대 그들이 마지막까지 붙드는 어휘는 특권과 사익 사이에 놓여 있을 것이다. 사익 극대화를 노리는 특권구조 안에 이들의 마지막 어휘의 거처가 있을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선구자 토머스 홉스는 “지배세력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진리가 자기들 이익에 반한다면 그 진리를 부정하고 기하학 책들을 모조리 불사를 것”이라고 <리바이어던>에 쓴 바 있다. 기득권 수호 의지는 그토록 집요하다. 대통령선거로 끝날 올해의 정치과정은 마지막 어휘들의 싸움이기도 하다. 리처드 로티라면, 좀더 인간다운 세상의 희망을 떠받치는 마지막 어휘들이 특권세력의 어휘를 제압하기를 바라 마지않을 것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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