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영무 논설위원
뜨뜻미지근한 정강정책으로
국민과의 약속이라며 내미는 손이
내키지 않는다
국민과의 약속이라며 내미는 손이
내키지 않는다
5년 전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첫 방문지로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택했다. 그는 비판을 두려워하면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며 과감한 친기업 정책을 약속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시장 프렌들리이고, 이는 서민 프렌들리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재벌 규율의 상징이었던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라는 마지막 빗장이 풀리자 재벌들은 거리낄 게 없어졌다. 주력사업의 경쟁력을 키우고 새로운 사업 분야를 개척한다는 명목으로 문구, 빵집까지 손을 뻗쳤다. 당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현 동반성장위원장)이 “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가 자칫 대기업들에 대한 규율 공백 상태를 야기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는데 그게 현실이 됐다.
재벌의 탐욕과 불법 행위는 규제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재벌이 기승을 부리기 훨씬 전부터 중소·자영업자, 노동자·농민은 신자유주의와 금융위기의 거센 파고에 노출돼 피해를 입어왔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보호막과 안전장치를 마련해줄 생각은 않고 낙수효과를 기대하며 재벌 편들기에 나섰다. 자식 많던 시절 장남에게 쏟아붓듯 대기업을 지원했다. 중소기업, 서민들은 소규모 개방경제의 충격파에 더해 재벌의 침탈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린 격이다.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8년부터 세계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좌초가 예견됐으나 이명박 정부는 그 뒷자락에 매달린 결과 화를 키웠다.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네 가구 가운데 한 곳이 빈곤을 경험했으며 빈곤이 장기화하면서 세대 간에 고착되고 있다. 올해 다보스포럼에서도 지금의 위기가 일시적이고 시장이 자기조정기능을 발휘해 극복할 것으로 보는 이는 극소수였다. 시장과 국가, 국제 거버넌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탓이다. 누구도 위기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소득 불균형과 정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게 거론됐다.
한나라당이 엊그제 복지와 일자리, 경제 민주화를 앞세운 정강정책 개정안을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큰 시장, 작은 정부에 기반해 보편적 복지를 복지 포퓰리즘으로, 경제 민주화를 좌클릭으로 비판했던 기조에서 선회한 것이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앞으로 우리 당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다. 시장경제의 활력을 저해하는 불필요한 규제는 과감하게 철폐하겠지만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과감하고 단호하게 개입하는 작지만 강한 정부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변신이 선거용은 아닐 것으로 믿는다. 새 정강정책 전문에서 명시했듯이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것이 시대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속성과 관성으로 볼 때 이만큼 궤도 수정을 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스스로는 뼈를 깎는 쇄신이라고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은 책임 있는 정부라면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이다. 재벌 봐주기로 손을 놓고 있다가 부산을 떠는 게 감동스럽지 않다. 맞춤형 복지는 선언적인 지향점이어서 후속대책을 봐야 진정성을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전에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보상이 없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경제 민주화도 정치 민주화처럼 과거의 잘못에 대한 실질적인 회복조처가 이뤄져야 의미가 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서민들이 벼랑 끝에 내몰리고 적잖이 나가떨어진 마당에, 증세나 구체적인 예산의 뒷받침 없이 ‘진심으로 죄송해요. 앞으로는 잘할게요’라고 하는데 휑한 괴리감이 든다. 약속은 당사자 간에 하는 것이다. 한나라당 안에서 꽤 산통을 겪었다고 하나 그런 정도의 성긴 뜨뜻미지근한 정강정책으로 국민과의 약속이라며 내미는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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