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매개자’는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가 자주 쓰는 개념 도구다. 지제크는 헤겔 철학의 연장통에서 이 도구를 얻어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처음 현실 분석에 사용했다. ‘사라지는 매개자’란 본디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퇴장하는 개념을 가리킨다.
사라지는 매개자의 활동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흔한 무대는 정치사다. 정치의 낡은 형식이 완강하게 버틸 경우 그 형식을 일시에 흔들어버림으로써 다른 형식이 등장할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사라지는 매개자다. 사라지는 매개자는 낡은 형식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변화의 에너지를 받아 키운다. 지제크는 프랑스혁명 때의 자코뱅이 ‘사라지는 매개자’였다고 이야기한다. 자코뱅은 구체제(앙시앵 레짐)를 깨부수어 새 체제의 판을 만들어주었다. “그들이 사라진 것은 약했기 때문에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사라진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도 사라지는 매개자를 찾아볼 수 있을까. 서울시장 선거에서 안철수는 확실히 사라지는 매개자였다. 나쁜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열망은 들끓는데 그 열망을 의탁할 곳을 찾지 못했던 국민은 안철수의 등장으로 일거에 활력을 되찾고 패배주의를 털어버렸다. 마지막에 박원순 캠프에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서는 순간의 그는 ‘사라지는 매개자’의 걸어다니는 판본이었다. 더 주목할 것은 그의 등장이 박근혜 대세론에 막혔던 국민의 정치적 상상력을 해방시켰다는 사실이다. 예정된 끝을 향해 천천히 돌아가던 맥 빠진 영화는 최종 결말을 알기 어려운 긴장감 넘치는 활극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를 타고 조연에 머물던 문재인이 주연급으로 떠오르더니 마침내 여론조사 다자대결에서 안철수를 앞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철수는 자신이 떠안은 열망을 새로운 대안에 넘겨주고 다시 한번 사라지는 매개자가 될 것인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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