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용덕 사회2부 기자
‘팽당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기업’을
이 땅에서 희망하는
것은 무리인가
성공하는 기업’을
이 땅에서 희망하는
것은 무리인가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은 망각이라지만, 잊혀지지 않도록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최근 방영중인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는 쌍용차 투쟁의 아픔을 기억나게 했다. 쌍용차 공장에서 경찰의 진압이 있던 그날, 옥상에서 취재하던 후배는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선배 죽을 것 같아요. 10m 앞에서 경찰이 최루탄을 쏴 배에 맞았어요.” 옥상에서 노동자들은 경찰 진압봉에 맞아 무참하게 쓰러졌다. 내게는 당시 본관 옥상 쪽에서 날아온 볼트와 너트가 있다. 그때의 참혹함을 잊지 않으려고 아직도 차 안에 두고 다닌다.
드라마에서 회생 가능성이 있음에도 공장폐쇄에 나선 경영진에게 주인공 유방(이범수 분)은 이렇게 내뱉는다. “회사를 위해 미치도록 일한 사람은 감방 가 있고, 열심히 일한 사람을 감방 보낸 사람은 상 받고 있고 이게 무슨 경우냐.” 쌍용차 정리해고 철회투쟁에 나섰던 한상균 노조지부장은 지금 감옥에 있다. “함께 살자”던 그가 왜 아직도 감옥에 있어야만 할까.
지난 15일은 이들이 해고철회 투쟁을 시작한 지 1000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사이 21명의 노동자가 자살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이곳저곳 이력서를 내보지만, 쌍용차 해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취업 자체가 어렵다. 노사 대타협이라며 무급휴직자 461명을 1년 뒤에 복직시키겠다던 회사는 지금껏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이 땅에서 ‘팽’당한 사람들이 어디 쌍용차 해고노동자뿐이랴. 6년 전인 2006년 5월4일 평택 대추리에서는 ‘이 땅에서 농사짓게 해달라’고 외치던 농민들이 국가로부터 ‘팽’당했다. 미군기지를 확장 이전하려는 정부는 1만5000명의 군경을 새벽에 동원해 농민들과 1000여명의 대추리를 지키려던 시민들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대추리에서 쫓겨난 한 노인은 “늘 대추리가 그립다”고 한다. 살아생전 그는 고향에 다시 갈 수 있을까.
드라마에서 유방은 해고자들을 모아 ‘팽성실업’을 만든다. 이름하여 ‘팽당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기업’이라는 뜻이다. 이 땅에서 ‘팽성실업’은 드라마에서만 존재하는 유토피아일까?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유방은 팽성실업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팽성실업은요, 이윤보다 사람이 우선이에요. 우리 회사에서 가장 큰 재산이 뭔지 아세요? (중략) 바로 여러분들이에요.”
이 땅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회사 경영진과 정부를 희망하는 것은 무리인가. 자신의 고향과 일터에서 추방된 이들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희망을 가질수록 그들의 절망과 고통 또한 더 깊어진다. 드라마 속 유방과 팽성실업은 현실에 없다. 현실에서는 그런 휴머니즘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절망이 깊다고 해서, 고통이 크다고 해서 희망을 서둘러 이야기할 수는 없다. 루쉰은 희망에 대해 “갈 길이 없지만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오히려 갈 길이 없기 때문에 더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1000년 이상을 고향에서 추방돼 유럽 등지를 떠돌던 유대인들은 매년 서로에게 이런 인사를 나눴다.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Next year in Jerusalem)라고. 비록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의 귀향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다. 이런 인사에 앞서 매년 봄이 오면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으며 그들의 선조가 이집트에서 해방되기 전 노예생활을 할 때의 참혹함을 기억했다고 한다. 이스라엘 건국의 청사진을 그린 테오도어 헤르츨은 자신들의 오랜 역사적 삶을 관통한 이런 고통이야말로 우리의 힘이라고 했다.
역설적이지만, 희망은 고통에 대한 끝없는 기억 투쟁에서 온다.
홍용덕 사회2부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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