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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잘못에 대처하는 두 자세 / 정재권

등록 2012-04-03 19:20수정 2012-04-03 23:07

정재권 논설위원
정재권 논설위원
잘못이나 위기를 모면하고픈
심정은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위기 때 정치인의 진면목은 드러난다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 책임이냐.”

1994년 10월21일 성수대교가 붕괴한 뒤 박지원 당시 민주당 대변인이 한 말이다. 정부 쪽에서 “관리 책임이 아니라 시공 잘못”이라는 주장이 나오자 이렇게 일갈했다. 박 대변인의 촌철살인으로, 책임을 회피하려 들던 정부는 본전도 못 찾는 신세가 됐다.

잘못을 저질렀거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모면하고픈 심정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잡아떼기도 하고, 너는 깨끗한 줄 아느냐며 진흙탕 싸움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정치인도 예외는 아니다. 흔히 정치인은 ‘부음란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신문에 이름이 나오기를 바라는 존재’라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를 키우는 쪽으로 사태가 흘러가는 것을 달가워할 정치인은 없다. 그래서 잘못과 위기의 국면은 정치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4·11 총선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국무총리실의 불법사찰 사건도 꼭 그렇다.

“그때 ‘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통곡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정부 출범에 참여한 제가 불법사찰 같은 시대착오적인 일을 끝끝내 막지 못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죄송합니다. 할 말 없습니다!”(정두언 의원, 트위터 글)

“특정 집단의 권력사유화를 막아내지 못한 대가로 불법사찰을 받았다고 억울함을 토로하기보다는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범죄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참담함이 더 큽니다.”(정태근 의원, 기자회견)

공교롭게도 두 의원은 불법사찰의 직접 피해자다. 이명박 정부 탄생의 공신이었지만 ‘영일대군’(이상득 의원)의 전횡 등을 문제삼다가 미운털이 박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희생자임을 부각시키며 불법사찰을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탓이오’라며 먼저 고개를 숙였다. 진솔한 사죄는 몇 배나 더 큰 국민의 믿음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두 사람뿐이다. 여당(정태근 의원은 새누리당을 탈당했으니 여당이라 부르기 애매하다) 안에서 공개적이고 진정 어린 ‘참회록’을 쓰는 정치인을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선거의 유불리를 따지며 이리저리 불똥 피하기에 바쁜 정략의 정치인만 넘쳐난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시각각 말 바꾸기와 책임 회피에 급급하고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가, 느닷없이 “사찰 문건의 80%는 노무현 정부의 것”이라며 청와대의 물타기에 동조한다. 그러다 “나도 사찰을 당했다”며 선 긋기에 열심이다. 그저 ‘네 탓이오’만 있을 뿐 ‘내 탓이오’는 없다. 그가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우는 일관성과 신뢰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박 위원장은 축구경기의 심판이 아니다. 4·11 총선이라는 그라운드에서 야당의 2번, 3번이 아닌 여당의 1번을 등에 달고 뛰는 선수이자 감독이다. 여당의 처지에서 이번 총선은 ‘박근혜의, 박근혜에 의한, 박근혜를 위한’ 선거나 마찬가지다. 그 팀에는 불법사찰을 저지른 집단이 함께 소속돼 있다. 그의 주장처럼 한때는 사찰을 받는 견제대상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처지가 180도 달라졌다.

이명박 정부의 불법사찰은 이번 선거에서 좋은 정치인을 고르는 기준을 하나 제공하고 있다. 정태근 의원이 기자회견에서 인용한 공자의 가르침이 그것으로, <논어> 위령공 편에 나온다. ‘군자는 모든 일(잘못)을 자기에게서 구하며 자기의 책임으로 하고, 소인은 모든 일을 남의 잘못으로 탓한다.’

정재권 논설위원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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