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권 논설위원
방송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압축판
이라면 그곳에도 고결함과 천박함,
천사성과 악마성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라면 그곳에도 고결함과 천박함,
천사성과 악마성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모른 체하고 그냥 지나치기엔 뒤끝이 개운치 않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라진 방송인 김구라 말이다.
김구라는 분명 ‘비호감’이다. 케이블방송을 거의 보지 않는 나에겐 지상파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이미지가 전부다. 그는 온 가족이 함께 시청하는 지상파에서조차 ‘구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악동 기질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김구라가 <문화방송> ‘라디오스타’에서 느물거리며 출연자를 향해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쥐거나(수입이 얼마냐?), 야유와 무시를 담아 상대의 말을 불쑥 자를 때 솔직히 낯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그는 막말과 속물근성을 대놓고 상품화하고 아슬아슬한 수위까지 밀어붙인다. 유재석 같은 ‘범생이과’가 되기엔 애당초 그른 캐릭터이지만, 뚜렷하게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했다. 방송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압축판이라면 그곳에도 고결함과 천박함, 천사성과 악마성이 공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구라가 그 가운데서 담당한 것은 남들이 꺼리는 천박함과 악마성이었다.
그런 김구라가 막말 파문으로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비록 10년 전 무명시절에 인터넷 방송에서 한 말이라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유흥업소 여성종업원들을 싸잡아 비속어로 비하한 것은 잘못이었다. 백번을 양보해도 사려깊지 못했다. 용서를 빌어야 마땅하다. 논란이 인 직후 “반성하고 자숙하겠다”며 물러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럼에도 가슴 한편이 씁쓸하다. 그의 하차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함께 목격한 느낌 때문이다. 우선 한번 걸리면 누구든 살아남기 어려운 엄숙주의 혹은 순결주의에 겁이 난다. 김구라의 무기는 두말할 필요 없이 구라다. 속은 썩고 곪았는데도 깨끗한 척 점잔을 빼는 세상을 비트는 게 임무다. 그런 모습에 혀를 차면서도 은근슬쩍 우리는 대리만족을 느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막말이 알려진 순간 세상은 온통 엄숙함으로 그를 비난하기에 바쁘다. 방송을 완전히 순백색으로 물들일 기세다. 그렇다고 세상이 맑고 깨끗해질까.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대통령의 ‘멘토’라는 인물이 4년여 동안 국정에 개입해 분탕질을 치던 와중에 자신에게 불법 로비자금을 전달한 브로커의 운전사에게 꼬리를 잡혀 2억원을 뜯기는 것이 현실이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에게 가장 두려웠던 존재는 대통령도, 야당 의원도, 성난 국민도 아니라 바로 운전기사였을 테니, 블랙코미디도 이런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이런 가짜 양들보다 악역을 자처한 김구라는 오히려 솔직한 존재였다. 그런데 우리는 늑대들에게 상대적으로 너그러웠던 건 아닌지 자문해본다.
표적을 정했다 싶으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공격성 또한 두렵다. 김구라가 물러난 뒤 그의 행적을 쫓기 위해 취재진이 아들 동현군이 다니는 중학교에까지 몰려든 모양이다. 등교하는 동현군을 붙잡고 아버지의 거처를 묻고, 같은 반 학생에겐 동현군의 상태를 물었다고 한다. 16살 소년에게 너무 가혹하다.
무엇보다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게 하고, 발언보다는 침묵을 선택하게 하는 ‘감시’체제가 공포스럽다. 10년 전이든 5년 전이든 과거에 했던 발언이나 글 하나가 난데없이 튀어나와 목을 조르고, 지금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린 얘기 한마디가 미래의 어느 날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흉기가 된다. 더욱이 그 얘기가 누군가를 조롱하고 풍자하거나, 다수의 생각과 차이가 나는 것이라면 위험의 가능성은 한층 커진다. 혹시나 김구라를 위한 ‘변명’으로 비칠지 모르는 이 글도 그래서 겁이 난다.
정재권 논설위원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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