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논설위원
떠오르는 중국에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할 것인가는
좌우를 나눌 문제가 아니다
지혜롭게 대처할 것인가는
좌우를 나눌 문제가 아니다
3년 전 ‘한국의 간디’로 불리는 함석헌 선생의 글 ‘새 나라의 꿈틀거림’(1961년 <사상계> 4·5·6월호 게재)을 읽다가, 중국의 위세를 “곤륜산 마루턱에서부터 굴러내리는 바위”라고 표현한 대목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차메리카’나 ‘G2’(양대 강국)라는 단어를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50년 전에 중국의 부상을 정확하게 내다본 예지력에 혀를 내둘렀다. 아마 그분의 고향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평안북도 용천이라는 점이 그런 선견지명을 키웠을 것이다.
지금 중국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하다. 보시라이 전 충칭 당서기와 천광청 변호사 사건으로 상징되는 권력층의 부정부패와 인권탄압 문제로 가끔 덜컹거리긴 하지만, 이런 추세라면 제5세대 지도자들의 집권 기간(2012~22년)에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 확실하다.
문제는 이런 중국이 우리 머리 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수출·수입 모두 우리의 1위 교역 상대일 뿐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하다. 러시아와 독일 통일의 관계처럼 중국은 남북 통일 과정에서 꼭 넘어야 할 큰 산이다. 먼 앞을 내다보고 중국과 전략적 협조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4년 동안 한-미 동맹 강화에만 힘을 쏟았다. 한 외교 전문가는 중국의 위상 변화에 눈을 감은 채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공고히 할수록 중국은 우리와 관계 발전을 더욱 필요로 할 것이라는 수교 당시의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 크다고 진단했다. 그 결과 한-중 관계는 1992년 수교 이래 가장 냉랭해졌다. 최근에야 한-중 자유무역협정 협상 등을 카드로 관계 복원에 힘을 쏟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지난 4년간의 미국 일변도 정책은 국내에 “우파 ‘친미반중’-좌파 ‘반미친중’”이란 이상한 대립구도를 만드는 데도 일조했다. 우파들은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 정도 이상으로 중국을 압박·비판했다. 반면, 좌파는 강정 해군기지나 한-미 군사훈련 등의 안보 현안이 제기될 때마다 비판의 근거로 중국의 우려를 끌어대곤 했다. 애초부터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선 미국과 중국의 동시 협력과 지지가 필요하다는 관점은 들어설 틈이 없었다.
수천년의 역사에서 한-중 관계가 소원했던 기간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1992년 수교 때까지 100년가량에 불과하다. 그 기간을 빼곤 중국의 강한 영향권에서 살아온 게 우리네 삶이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수교 이후 중국을 상대해온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중국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대국으로서 대범함과 무자비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이번에 한-중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시작하면서 동맹국인 미국도 꺼리는 개성공단 원산지 인정을 과감하게 수용한 게 대범함의 표시라면, 2000년 900만달러의 마늘 수입 금지에 5억달러어치의 휴대전화 및 폴리에틸렌 수출 금지라는 엄청난 보복을 가한 것은 무자비함의 상징이다.
특히 경계할 대목은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 가능성과 관련한 중국의 북한 비판 움직임을 잘못 읽고, 우리가 베이징을 지렛대로 평양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다고 과신하는 것이다. 중국에 북한은 골치 아프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존재다. 당분간 서울~베이징의 거리가 평양~베이징보다 짧아지길 기대하긴 어렵다.
함 선생은 앞의 글에서 중국의 기세는 힘이나 맞겨루기 외교가 아니라 지혜로만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떠오르는 중국에 압도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에 지혜롭게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건 좌우가 따로 없는 국가 존망의 문제다.
오태규 논설위원 트위터·페이스북 @ohta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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