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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호모 엠파티쿠스를 위하여 / 조일준

등록 2012-05-27 19:23

조일준 국제부 기자
조일준 국제부 기자
벌써 10년째 마음에 맺힌 게 있다. 2002년 12월 마지막 밤, 세상은 새해맞이에 들떠 있었다. 나는 텅 빈 신문사 편집국에서 혼자 있었다. 숙직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경비실 아저씨께서 “어떤 분이 찾아와 이상한 말을 하는데 기자가 만나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경기도 어디에서 왔다는 40대 남자는 대뜸 부족한 택시비부터 내달라고 했다. 술냄새가 섞인 하얀 입김이 찬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엉겁결에 2만원을 주어 택시를 보냈다.

그런데 이 남자, 털어놓는 얘기가 기가 막히다. 얼마 전 북한에 다녀왔는데 불안해 잠이 안 온다, 자수를 하고 싶은데 경찰서 앞에서 몇차례나 발을 돌렸다, <한겨레>에 말하려고 왔다…. 어이가 없고 난감했다.

남자는 아내와 이혼하고 딸마저 내준 뒤 중국집 주방 보조로 살고 있었다. “뉴스를 보니 북한 주민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최악의 기근과 자연재해로 수백만명이 굶어죽고 있었다. 남자는 자기라도 동포를 먹여살리고 싶었다. “짜장면 한 그릇이면 다른 먹을거린 없어도 되니까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 북-중 접경지대인 단둥에서 강물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경비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경찰에) 전화할까요?” 나는 마땅한 대답을 못 찾고 머뭇거렸다. 남자는 짧은 한숨 뒤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달 가까이 북한 당국의 심문을 받았지만 ‘개털’이었다. 결국 신변안전 보증서와 약간의 노잣돈을 받아들고 중국으로 추방됐다고 했다. 돌아온 뒤엔 뿌리 깊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표어에 짓눌렸을 것이다.

갑자기 경찰차가 왔다. 뜻밖의 상황에 당혹감과 자괴감이 엄습했다. 경찰서 보안과까지 동행해 남자의 진술서 작성을 지켜봤다. 조금 뒤 군 기무사 장교들이 왔다. 내가 남자에게 해준 일이라곤, 짐짓 큰소리로 형사소송 절차와 피의자 권리에 대한 지식을 말해준 뒤 휴대전화 번호를 교환한 게 전부였다. 굶주리는 동포에게 짜장면을 먹이고 싶었던 남자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의 잠입·탈출과 회합·통신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감옥에 갔다.

이건 대체 희극인가, 비극인가. 자신도 밑바닥이던 사내를 움직인 건 곤궁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을 게다. 공감을 뜻하는 영어 단어 ‘sympathy’는 그리스 어원의 syn(함께, 비슷한)과 pathy(고통, 질병, 치료법)의 합성어다. 공감은 타자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함께 느끼며 도우려는 감정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를 주창했다. 인간의 본성은 ‘공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과학계에선 공감을 개체와 집단의 생존에 유리하게 진화한 능력으로 본다. 관계맺기를 통해 위험을 회피하고 긍정적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감 능력의 결여는 자폐증, 극단적일 경우 사이코패스를 낳는다.

국제앰네스티는 24일 발표한 <2012 연례보고서>에서, 지난해 한국에서 표현과 집회의 자유가 이전보다 더 제한됐다고 평가했다. 특히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자들에게 국가보안법을 불합리하게 적용하는 사례가 늘었다.” 선의의 공감이 블랙코미디가 되고 ‘종북주의’ 주홍글씨 놀이가 횡행하는 건 분명 퇴행적 비극이다.

조일준 국제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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