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논설위원
우리나라에서 일본 문제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 우선, 보수와 진보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다.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군사 역할 확대, 우경화에 대해선 좌우 구분 없이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낸다. 아마 사사건건 좌우가 갈리기 일쑤인 우리나라 풍토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김영삼 정부 이후 이른바 ‘4년차 증후군’이 고착화한 것도 특색이다. 정권 초엔 한-일 간에 훈풍이 불다가 임기 5년 중 4년째쯤 되면 한파가 몰아치는 현상이 되풀이된다. 김영삼 정부는 초기 1993년 11월 경주 정상회담에서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과거사 사과 발언으로 좋은 출발을 끊었다. 하지만 과거사와 독도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일본의 한-일 어업협정 일방 파기와 금융위기 비협조라는 고약한 퇴임선물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도 1998년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21세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하며 창대한 시작을 했으나, 2001년 교과서 검정 문제와 8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로 원점으로 돌아갔다. 노무현 대통령 또한 임기 동안 역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막바지에 ‘각박한 외교전쟁’을 선언했다.
당선인 시절부터 ‘과거사 사과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이명박 대통령도 결국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다. 지난해 12월 교토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성의있는 해결을 촉구한 데 대해 노다 요시히로 총리가 오히려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평화비 철거를 요구하는 식으로 나오자, 미소외교를 가차없이 거둬들였다. 지금도 이런 냉기류가 지속되고 있다.
한-일 사이에 이렇게 냉·온탕이 반복되는 이유는 왜일까? 일본은 정권 말기에 지지도가 떨어지는 우리 쪽이 지지를 떠받치기 위해 반일감정을 이용한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이는 군사정권 때나 있을 법한 가설의 연장에 불과하다. 실제, 문민정부 이후 벌어진 한-일 갈등의 사례를 살펴보면 대부분 우리 쪽이 아니라 ‘과거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일본 쪽에서 비롯했다. 최근엔 매년 총리가 1명씩 갈릴 정도로 불안한 정세가 이어지면서 대외적으로 속좁은 대응이 잦아졌다.
그렇다손 쳐도 답을 우리 쪽에서 찾는 게 좋다. 정권마다 ‘과거사 문제에도 불구하고 큰 나라인 일본과 갈등을 빚는 건 우리 쪽이 손해’라는 한-일 협정 당시의 낡은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갈등의 근본 해결보다 임시방편의 정치타협을 추구해온 게 우리의 현실이었다. 또 ‘우리가 먼저 잘해주면 일본도 성의를 보이겠지’ 하는 안이한 자세로 일관했다.
이런 쳇바퀴에서 벗어나려면, 과거의 온갖 잘못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라는 블랙홀에 몰아넣은 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는 일본 쪽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한-일 관계의 ‘시시포스의 비극’은 피할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역사와 다른 현안을 분리해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싸울 것은 싸우는 의연한 자세를 고수할 필요가 있다. 마침 최근 잇달아 나온 헌법재판소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의 부작위 위헌 판결이나 대법원의 징용 피해자 개인청구권 유효 판결은, 더는 역사 문제의 섣부른 정치타결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아시아에서 일본과 함께 유일하게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고 인권 등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로서 전면적 관계발전을 향한 실질 협력은 강화해 나가되, 과거사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선 안이한 타협을 하지 않고 정면돌파하는 힘든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로 인해 생기는 제한적인 삐걱거림은 기꺼이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오태규 논설위원 트위터·페이스북 @ohta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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