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목동교 밑을 지날 때면 그 색소폰 소리가 들리곤 했다. 봄밤, 안양천 산책로를 거닐 때의 일이다. 누군가 이광조의 노래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을 멋들어지게 연주한다.
‘아~ 당신은 당신은 누구시길래/ 내 맘 깊은 곳에/ 외로움 심으셨나요~’
처음 들을 땐 자주 끊기던 연주가 이젠 제법이다. 색소폰 소리에 맞춰 가사를 흥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촉촉한 감흥에 젖는다. 학창시절 첫사랑의 추억도 되살아나고, 연애시절 애틋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바쁘게 살면서 안양천변 걷는 일이 그렇게 달콤짭조름한 줄 미처 몰랐다.
손학규 민주당 전 대표가 얼마 전 대선 출마 선언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을 했을 때 대번에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아, 내가 저녁에 때때로 안양천변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삶을 말하는구나, 이렇게 말이다. 저녁이 있는 삶이 별건가? 단출한 저녁식사 뒤 부부가 손잡고 동네 공원을 거닐거나,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 타거나 배드민턴 치는 것, 동네 호프에서 이웃과 가볍게 맥주 한잔 하는 것 등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너무 저녁 없는 삶을 산다. 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하거나, 아니면 일할래야 일할 자리가 없다. 각박한 세상사에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도 많다. 집에서 아이 뒷바라지라도 할라치면 또 힘들다. 아이는 아이대로 저녁까지 힘들고 바쁘다.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는 맞벌이 부부가 저녁에 여유를 부릴 새는 별로 없다. 파트타임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역시 마찬가지다. 저녁도 모두 반납하고 분투하는 삶으로 이만큼 풍요를 이뤘지만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다. <돈의 맛>이란 영화대로라면 재벌가 사람들도 불행하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서는 제도와 관행, 문화 등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저녁 있는 삶이란 게 놀고먹자는 건 아니다. 경제적 풍요가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선에서 그 부를 어떻게 하면 더 키우고, 좀더 많은 사람이 누리도록 하느냐의 문제다.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해결, 사교육 해소, 육아 환경 개선 등 모든 게 맞물려 있다. 질 좋은 일자리를 계속 제공할 수 있는 성장의 문제도 중요하다.
직장문화·가정문화·사교문화 등 사회문화 풍토도 변해야 한다. 매일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일의 연장으로 술밥 먹어야 하는 직장문화는 이젠 걸림돌이다. 평일 중 하루이틀이라도 일찍 퇴근해 안양천변이라도 걷는 것이 결과적으로 창의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다.
저녁이 있는 삶 하면, 손학규 전 대표는 동네에서 막걸리 한잔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문재인 고문은 부인 김정숙씨와 알콩달콩 손잡고 동네 마실 가는 모습이 어울린다. 김두관 경남지사는 동네 이장처럼 이웃 어른들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제격이다.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은 저녁 시간 집에서 편안하게 요가를 하며 하루를 정리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손 전 대표가 화두를 던진 만큼 다른 대선 주자들도 더 좋은 화두, 더 좋은 실현방안을 찾기 위해 경쟁했으면 싶다. 문재인 고문이 출마 선언 때 일자리 혁명을 이룩한 대통령, 복지가 있는 성장을 얘기한 것 역시 국민에게 여유로운 저녁을 찾아주자는 것일 게다. 출마 선언을 앞둔 박근혜 전 위원장이 총선 때처럼 복지 문제에 관심을 쏟을지도 지켜볼 일이다. 성장 일변도 방식에서 벗어나 업그레이드된 사회발전전략을 통해 국민에게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는 것, 대선 주자를 평가하는 좋은 척도가 될 듯싶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게 남에게 맡겨둘 일만도 아니다. 스스로 마음의 풍요로움을 찾는 일도 게을리할 수 없다. 오늘 밤 어디서든 자신만의 저녁을 한번 찾아보시라.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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