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무 논설위원
미국 뉴욕에서 손자 셋을 돌보는 가난한 할아버지가 손자들이 배고파 우는 모습을 보다못해 빵을 훔쳤다. 판사는 노인에게 벌금형을 내렸으나 노인에 대한 단죄로 그치지 않았다. 무엇이 이 불쌍하고 힘없는 노인으로 하여금 빵을 훔치게 만들었는지 진지하게 물었다. 판사는 자신을 포함한 뉴욕 시민 모두의 책임이라고 선언하면서 스스로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방청객들에게도 벌금을 내게 했다. 그리고 즉석에서 벌금을 걷어서 노인에게 줬다.
서울 강동·송파구의 대형마트가 공휴일 영업제한 처분은 과도하다며 낸 송사를 보면서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라가디아 판사의 법정이 떠올랐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의무휴업을 하도록 해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에 한가닥 희망줄이었다. 하지만 유통재벌들은 헌법소원에 이어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서울행정법원은 지난주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의 판결은 절차적 위법이 있다는 것이지만 아쉬움이 없지 않다. 대형마트 입점을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일요일과 공휴일 영업 전부를 제한하는 것도 아닌데, 중소상인들에게 한달에 한두번 정도의 의무휴업도 양보 못하느냐는 것이 국민 대다수의 정서다. 일부 대형마트는 판결이 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주말 영업을 재개했다. 다행히 법원은 대형마트 등의 운영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 중소상공인을 보호하려는 취지는 그 정당성을 인정했다.
눈앞의 이익을 챙겼지만 대형마트들은 더 큰 역풍을 부를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사전에 상생 따위는 없다는 것을 천명한 꼴이기 때문이다. 시장 상인들이 “이제 막 산소호흡기를 대고 살아보려 하는데 그것조차 못 봐주겠다, 그러니까 그냥 죽으라는 것이냐”고 분노할 만하다. 유통법 개정안은 대형마트의 자본력과 영업력에 속수무책으로 잠식당해온 중소상인들이 들고일어나 얻어낸 최소한의 성과물이다. 소상공인진흥원이 지난 4월 중순부터 조사한 결과를 보면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에는 전통시장을 포함한 중소상인들의 매출과 고객 수가 10% 안팎 증가했다. 요즘 날씨 같은 지독한 가뭄에 해갈은 언감생심이지만 입술이라도 축일 수 있는 단비다. 1999년부터 10년 동안 롯데마트·이마트·홈플러스 3개 대형마트의 매출이 7조원에서 36조원으로 늘 때 전통시장은 46조원에서 24조원으로 줄었다. 주름살만큼이나 오래 지켜왔던 삶의 터전에서 가게세·전기료조차 내지 못해 거리에 나앉은 중소상인들이 부지기수다.
대형마트들은 시장원리를 내세우지만 사회가 유지·존속해야 시장도 있는 법이다. 대형마트의 출점과 영업 제한은 서구 유럽에서는 보편화되어 있는 법제들이다. 독일은 대형마트의 출점을 까다롭게 심사하며 일요일 영업을 제한한다. 프랑스도 일요일 영업을 제한하되 식품유통 매장만 오전까지 영업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평일 근무의 2배 임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 헌법은 경제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형마트 규제 입법은 17대 국회부터 논의됐지만 로비와 반대에 부닥쳐 번번이 무산됐다. 우리 사회의 공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탓이므로 시장의 몰락은 공동책임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라가디아 법정이라면 방청객인 나도 벌금을 물어야 할 듯하다. 그저 약간의 편리함과 미끼상품에 끌려 시민으로서의 나를 소비자로서의 나에게 온전히 내주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견디지 못하고 도태되면 그 대기업은 자연히 독과점 기업으로 군림할 것이요, 소상공인의 몰락은 커다란 사회적 비용으로 청구될 것이다. 다시 포화상태에 이른 대형마트들이 창고형 할인점으로 변신해 영역 확장에 나선다는 소식이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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