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규 정치부장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은 ‘수성(守城)의 달인’이다. 공격보다 수비에 능하다. 수비에서 좀처럼 실수가 없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제2당으로 전락할 것으로 예견됐던 여당을 ‘과반 1당’으로 지켜냈다. 2004년 총선 때도 천막당사를 치며 탄핵 돌풍을 막아냈다. 그가 진두지휘한 두 차례의 총선에서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은 이전보다 의석수가 감소했지만 예상보다는 덜 줄었다. 대형 실점을 할 위기상황에서 적은 점수만 내줬다. 수비를 잘했다는 얘기다.
지지율 40%대의 박근혜와 대적하겠다는 민주당 주자들은 공성(攻城)을 해야 할 처지다. 로마군은 성을 공격할 때 투석기를 쏘고 성문을 뚫는 충차를 굴리며 공성탑을 이용해 죽기살기로 성벽에 기어올랐다. 소극적인 공성 전략이란 애당초 있을 수 없다.
민주당 대선 주자들이 출마선언을 하면서 곳곳에 미래 비전을 내세운 깃발이 펄럭인다. 광화문 세종대왕상 앞에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이 내걸렸고, 서대문 독립공원엔 문재인의 ‘우리나라 대통령’이 나풀거렸다. 종로 시장통에선 정세균의 ‘빚 없는 사회, 편안한 나라’가 나부꼈고, 곧 해남 땅끝마을에서 평등·서민을 화두 삼은 김두관의 깃발이 올라갈 거란 소식이 들린다.
여유롭고 정의와 복지가 넘치며 평등하고 평화로운 나라, 다 솔깃하고 아름다운 얘기들이다. 싫어할 사람이 별로 없다. 정치구호에 반대 목소리가 없다는 건 힘이 없다는 얘기다. 역대 대선을 보면 격렬한 논란을 부른 ‘빅이슈’가 있었다. 그리고 늘 논쟁을 주도적으로 이끈 쪽이 승리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민주당 주자들이 논쟁을 촉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성을 무너뜨리려고 공격하는 자의 담대함이 부족하다. 오히려 박근혜 쪽이 진보적 이슈로 영역을 넓히며 공격적 진용을 갖추고 있다. ‘경제민주화’의 저작권이 있는 김종인 비대위원을 ‘박근혜 캠프’의 앞자리에 내세운 게 대표적이다. 둘째, 사회를 어떻게 뜯어고치겠다는 건지 그 방법을 손에 잡힐 듯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한 탓도 있다. 깃발에 내건 목표는 추상적이고 그곳에 이르는 길은 흐릿하다.
민주당 주자들의 방책 가운데 몇가지 주목할 만한 것들은 있다.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은 흡인력 있는 깃발이다. 그런 삶을 만들겠다고 그가 노동분야 정책으로 제시한 노동시간 단축과 이를 위한 정시퇴근제 도입도 눈에 띈다. 여기에 더해 교육, 보육 등의 분야에서 구체적인 방안이 추가로 나온다면 생산적인 논쟁으로 불붙을 수 있을 것이다. 김두관이 ‘사회적 약자는 한 발짝 앞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해야 정의로운 사회’라고 한 대목은 과감한 어퍼머티브액션(소수자 우대정책)을 예고한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상에 서게 하는 것이 정의’라는 안철수의 생각과 차별성이 엿보인다. 공약으로 구체화된다면 좋은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선은 어떤 나라를 만들지를 놓고 토론하는 경연장이 돼야 한다. 대선에서 제시된 미래사회에 대한 설계도와 그를 둘러싼 토론의 폭과 깊이만큼 그 사회는 발전한다. 보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은 구태여 논쟁을 일으킬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므로 수비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국민 전체의 이익인 것처럼 포장하는 게 보수 정치세력이 선거에서 치중하는 일이다. 그래서 선거에서 변화의 이슈를 내걸고 논쟁을 촉발하는 건 늘 진보 정치세력의 몫이다. ‘1% 대 99%’가 지구적 의제로 떠오르고 대중의 삶이 휘청거리는 난세, 담대한 발제자가 그립다.
임석규 정치부장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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