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원 통일외교팀장
영국의 총리는 1년 내내 매주 수요일 낮 12시부터 30분 동안 의회에서 야당 대표, 의원들과 중요 현안에 대해 토론한다. ‘총리에게 묻기’(Prime Minister’s Questions)란 코너다. ‘비비시(BBC) 팔러먼트’가 이를 생중계하며, 이 동영상과 속기록은 의회 웹사이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7일에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와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 대표가 연료세와 세금 회피 문제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총리이던 1881년부터 131년 동안 영국 총리는 이렇게 야당과 토론해왔다. 독자님들도 영국 의회 웹사이트(parliament.uk)에 들어가 영국 총리가 야당과 얼마나 치열하고 유쾌하게 토론하는지를 한번 구경하시기 바란다.
캐머런 총리와 밀리밴드 대표가 토론하기 전날인 26일 아침, 한국의 김황식 국무총리는 ‘한-일 군사비밀정보 보호협정’을 국무회의에서 ‘몰래’ 의결했다. 27일 <세계일보> 폭로로 시민과 야당, 심지어 여당까지 강하게 반발하자, 정부는 ‘제2 촛불시위’를 우려했는지 29일 예정된 이 협정 체결을 무기한 연기했다.
29일 저녁 김황식 총리는 보도자료를 내어 “상대국과 관련 절차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개하지 않는 것이 외교적 관례”라며 “이번 협정은 숨겨서도 안 되고 숨겨질 수도 없는 사안”이라고 앞뒤 문장이 전혀 호응되지 않는 궤변으로 해명했다.
김 총리에게 묻는다. 앞으로 김 총리는 상대국과 절차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협정도 공개하거나 토론하지 않을 것인가? 또 앞으로 모든 협정에 대한 공개와 토론은 이번처럼 상대국과 절차가 완료된 시점부터 시작할 것인가? 정말 그렇게 할 것인가?
사실 김 총리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그는 총선거에서 이겨 의회에서 ‘선출된’ 총리가 아니라 대통령이 ‘임명한’ 총리다. 대통령의 망석중이, 바람막이인 한국 총리는 권한은 거의 없고, 책임은 매우 크다. 김 총리도 이 협정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켜야 할 때 우연히(?) 외국 출장을 떠난 이명박 대통령을 대신해 그 십자가를 졌을 뿐이다. 어찌 보면 그는 희생양이다.
영국의 총리는 매주 의회에 나와서 현안에 대해 야당과 토론할 뿐 아니라, 중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다우닝 거리 10번지의 총리 관저 앞에 나와 언론과 시민에게 자신의 의견을 직접 밝힌다. 심지어 캐머런 총리는 지난 14일 ‘전화 도청 사건’을 조사중인 ‘레비슨 조사위원회’에 나와 세간의 의혹을 받는 루퍼트 머독과의 친분과 머독의 비스카이비(BSkyB) 인수에 대해 직접 답변했다.
영국의 총리가 주권자 앞에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마도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튼튼한 민주주의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영국의 총리는 과거에 왕의 신하였고 지금도 형식적으로는 왕의 신하이기 때문에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밴 것 같기도 하다.
그에 비해 한국의 대통령은 너무나 주권자에게 외람되이 행동한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은 주권자로부터 5년 동안 위임받는 권력을 자신의 사유물로 착각하는 듯하다. 시민의 신하로서 시민의 뜻에 복종해야 하고, 모든 중요한 일을 시민의 대표 기구인 의회와 상의해 처리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시민들은 이 대통령이 임기 말에 이런 군사협정을 몰래 맺거나 인천공항·고속철도를 무리하게 팔지 않기를 바란다. 또 이 대통령이 자신의 책임 아래 이뤄진 일에 대해 주권자에게 성의있게 답변하기를 바란다. 그게 주권자에게 신하가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김규원 정치부 기자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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