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무 논설위원
미국에선 판사를 저지(Judge)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대법관은 저스티스(Justice)라고 한다. 대법관이 정의의 최종 판단자이기 때문이다. 대법관은 도덕성에서 완벽에 가까워야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최근 대법관 인선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추상같고 재벌에 관대한 판결이 큰 혹으로 불거졌다.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 흐름과 동떨어진 법원의 ‘생얼’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재벌 총수에 대한 법원의 차별적 대우는 법원이 불신을 받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1990년 이후 10대 그룹 총수 가운데 7명이 모두 22년6개월의 징역형 판결을 받았지만 모두 집행유예를 받았다. 이건희 삼성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 박용성 전 두산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은 중한 경제범죄를 저질렀지만 하나같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징역 3년이 집행유예를 병행할 수 있는 최고 형량인 탓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은 정찰제 판결이 됐다.
법원은 기업과 사회에 기여한 공을 들어 재벌 총수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 총수가 없으면 기업이 망하고 경제도 나빠진다는 도식이 머릿속에 박힌 듯하다. 실형 선고를 망설인 가장 큰 이유로 ‘우리나라 경제가 위기에 처할 위험이 있는데 도박을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판결문을 쓴 판사도 있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을 제쳐놓고 법원이 나라경제염려증에 감염됐다는 비아냥을 들을 만하다. 미국 엔론의 전 최고경영자가 1조5000억원의 분식회계로 종신형에 가까운 24년4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것과 대비된다.
새누리당이 거액의 횡령·배임을 저지른 총수가 법원의 집행유예 판결로 실형을 면하는 사례를 원천차단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나선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판사가 재량으로 형기를 낮춰준다 해도 집행유예가 가능한 3년 이하로 내려가기 어렵게 된다. 얼마나 사법정의가 재벌 총수들을 피해갔으면 아무리 봐줘도 징역은 살게 하겠다는 개정 법안까지 나왔겠는가.
하지만 법과 제도를 아무리 잘 갖추더라도 판사의 재량으로 재벌 총수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리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도 법의 문제가 아니라, 법체계 안에서 재판을 질질 끌고 재판장이 가볍게 선고하는 게 문제라고 한다. 엄정하지 못한 법집행은 총수 개인의 범죄뿐만 아니라 경영권 승계, 일감 몰아주기, 사업기회 유용 등 총수 일가와 관련된 불법 행위를 조장한다.
무엇보다 거대 로펌이 합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조계의 구조적 문제를 손질해야 한다. 거물급 변호인단이 구성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자연스레 인맥과 로비를 상상한다. 판사들은 퇴임 뒤 거대 로펌에 영입되기를 희망하거나 법조계에서 평판이 저하되는 것을 두려워해 거대 로펌의 요구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그러한 의심을 떨쳐내도 자본권력 앞에 선 법원의 생리가 의구심을 낳는다.
법무법인 화우의 양삼승 변호사는 <조선일보> 기고에서 판사들은 재판에서 최소한 의식적으로 정의를 외면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지위나 편안함을 희생하면서까지 정의를 선언하고 실천할 용기나 기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진단했다. 판사들은 중히 여기는 자존심을 적절한 선에서 확보하기 위해 ‘비투쟁적 성향을 모든 단계에서 보이며, 순차적으로 다음 목표를 위해 자중자애하는’ 게 법칙에 가깝다고 한다. 이렇다면 법원이 경제민주화의 구멍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는 턱걸이했지만 앞으로 재벌 편향 대법관은 꿈도 꾸지 못하게 하고, 총수 재판에 대한 사법감시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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