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작년에 우연히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정치 공부를 몇 번 도와준 일이 있다. 도우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어떻게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멋쩍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생각을 조금 더 잘 알 수 있는 계기는 됐다.
최근 <안철수의 생각>을 읽고는 그가 정치가에게 필요한 기본 덕목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가에게 필요한 첫째 덕목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것은 공동체가 처한 현실을 냉철하고 정확하게 통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안 원장이 밝힌 사회 현안에 대한 생각들은 그가 롤모델로 삼고 싶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로 많은 부분 설명이 가능해 보인다. 루스벨트가 추진했던 뉴딜개혁은 미국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거대독점체의 폐해를 타파하고, 노동자·화이트칼라·중간층·흑인과 혁신적 산업자본까지를 포괄하는 정치동맹을 구축하여 사회적 견제와 균형을 확립하는 ‘진보적 자유’의 노선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미국을 인류 역사상 최강의 나라로 도약시켰다.
지금 한국도 당시 미국과 유사한 국가발전 단계에 처해 있다. 특히 재벌을 중심으로 특권집단들이 사회혈맥을 틀어막아 공동체가 균열되고 마비되는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런 구조를 타파하고 부강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정치리더십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안철수 원장이 밝힌 현안에 대한 입장들은 이처럼 거대하게 구멍 뚫려 있는 한국의 정치공간을 포착하고 이 지점에 자신의 역사적 소임을 설정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안 원장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의 가치정체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위치를 ‘중도’와 ‘무당파’라는 용어로 설명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세간의 통념과 유혹에 상관하지 않고 진지한 고뇌를 통해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과제를 상당히 정확하게 성찰해냈으며, 그 면에서 야권의 대선주자들을 앞질렀다.
그러나 안 원장이 국민적 열망을 받아안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보인다. 그가 대선에 출정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정당에 대한 고민이다. 지난 총선의 교훈이 있다면, 국민의 열망이 아무리 강렬해도 정당리더십이 부실하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야권 대선후보가 제자리를 잡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수순”이 될 거라고 봤다고 했다. 그를 제자리로 돌려보내지 못하는 야권의 문제는 무엇인가. 지금 야권 대선주자들은 모두 좋은 정책들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들의 과거 행보와 맞지 않는 이율배반성, 그들 주변에 포진한 사람들의 면면 때문이다. 민주통합당은 지난 총선을 과거 오류를 정리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했지만 계파 주도권을 잡는 데 몰두하면서 혁신과 미래경쟁에서 새누리당에조차 밀리고 말았다.
안철수는 이런 정당정치의 현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그에게 주어진 국민의 열망은 단순히 정권교체가 아닌, 세상을 바꾸라는 엄중한 요구다. 이를 위해 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늙고 병든 정당들의 리더십을 대체할 새로운 ‘코어’를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의제의 근본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가치·노선·의지를 공유하는 전사들의 집단리더십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가 대선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는 여기서 판가름난다.
고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