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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같기도’ 서울 수돗물 / 권혁철

등록 2012-08-14 19:23

권혁철 사회2부 수도권팀장
권혁철 사회2부 수도권팀장
지난해 여름,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유럽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형편에 비춰 무리해서 여행을 떠난 것은 아들·딸에게 넓은 세상,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여행을 마칠 때 아이들에게 “유럽에서 뭐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심 고색창연한 런던의 거리 풍경, 웅장한 고딕양식의 파리 노트르담성당, 미술관의 렘브란트 그림 같은 답변을 기대했다.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비싼 물값”이었다. 나라마다 달랐지만 가게에서 파는 생수 한병이 2000~3000원이고, 식당에선 물값을 따로 받았다. 유럽 식당에선 물값이 주문한 음식 값의 20~30%가량 됐다. ‘물은 셀프’인 한국 식당에서처럼 유럽 식당에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간 물값만 1만~2만원쯤 내야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유럽의 수돗물에는 석회질 성분이 포함돼 있어 사람들이 수돗물을 잘 마시지 않는다. 수돗물 사정이 좋지 않다 보니, 유럽에선 생수 등 물값이 비싸다”고 설명해줬다.

양치질도 생수로 해야 할 정도로 물 사정이 나쁜 나라들에 견주면 우리는 안전한 수돗물을 값싸게 사용하고 있다. 서울시는 수돗물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을 넘어 ‘건강하고 맛있는 물’로 올라섰다고 자랑한다. 그런데도 각종 조사 결과를 보면,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는 서울시민은 2~3% 수준이다. 대부분은 수돗물을 끓여먹거나 정수해 마시고, 생수를 사다 먹는다. 지난 9일 한강에 4년 만에 조류주의보가 발령되자 생수 매출이 평소보다 50~60%가량 급증한 것은 수돗물 불신의 표출이다.

서울시 출입기자인 나는 주변의 아는 사람들한테서 “한강에 녹조가 번졌는데 수돗물 먹어도 되나요”란 질문을 자주 받는다. 취재를 해봐도 딱 부러지는 답이 나오지 않아, “안전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며 이도 저도 아닌 ‘같기도 답변’을 하는 게 고작이다.

‘녹조에도 불구하고 수돗물이 안전하다’는 서울시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환경단체, 대학교수 등 전문가들에게 물어봤다. 서울시의 주장이 과학적으로 틀렸다고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수돗물이 100% 안전하다’고 단언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수돗물 원수인 팔당 상수원이 오염되는 상황에서 서울시가 정수장에서의 분말활성탄 투입, 염소소독 등으로 수돗물 안전을 보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가 ‘수돗물을 끓여먹으면 된다’고 설명해도 ‘녹조라테’란 말이 나올 정도로 온통 초록빛인 한강물을 본 시민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폭증하는 생수 수요를 잡기 위해 관련 업체들은 ‘식수 위기 탈출 브랜드 생수 기획전’까지 벌이고 있다. 대한민국 정책 포털 ‘공감 코리아’는 “녹조 발생은 기후변화에 의한 자연현상”이란 기사를 올려놓고 있다.

내가 보기에 녹조보다 더 큰 문제는 시민의 수돗물 불신, 생수업체의 공격적 마케팅, 국가의 무책임이란 삼각파도에 휩싸여 ‘값싸고 안전한 물은 공공재이고 시민의 보편적 권리’란 인식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현실이다. 수돗물 값은 t당 720~730원이고 생수 1t은 140만~160만원이다. 생수가 수돗물보다 2000배 안팎 비싸니 ‘생수로 식수 위기 탈출’은 흰소리다. 수돗물 안전 논란이 벌어지면 생수 사재기에 그칠 게 아니라 “물의 가치, 인권과 책임, 환경 우선과 보호, 사유재와 공공재, 정부 개입과 개혁 등을 아우르는 데까지 범위가 확대되어야 한다”(피터 글렉 미국 오클랜드 퍼시픽연구소 소장)고 본다. 1886년 미국 뉴욕의 공공 급수대에는 성경에서 따온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권혁철 사회2부 수도권팀장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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