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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대인시장 기름집 이민자씨 / 정대하

등록 2012-08-28 19:15수정 2012-08-28 23:11

정대하 사회2부 호남제주팀장
정대하 사회2부 호남제주팀장
광주광역시 대인시장 영광 참기름집 주인 이민자(56)씨는 일하면서 단가 가사를 외운다. 기름 짜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손님들도 눈치를 채지 못한다. 단가란 판소리를 하기 전에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짧은 노래를 말한다. 단가 ‘백발가’를 중얼거리다가 ‘죽어지면, 북망산천 흙이로구나’라는 대목을 부를 땐 마음이 찡해온다. 요즘엔 판소리 <심청가> 중 한 대목을 배우고 있다. 이씨는 대인시장 안 고깃집, 젓갈집, 식품점 주인들과 함께 매주 화요일 가게 영업이 끝나면 시장 들머리 건물 2층에 있는 ‘소리방’으로 간다.

이씨의 소리 선생은 젊은 소리꾼 김지연(32)씨다. 광주시가 2009년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예술시장 프로젝트’에서 입주작가로 참여했던 김씨는 그해 8월부터 상인들에게 민요와 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씨도 그때 처음 국악을 만났다. 이씨는 최근 회원 10여명과 한사람씩 소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품평회도 열었다. 에어컨도 없는 작은 방에서 땀이 줄줄 흘렀지만 즐거웠다. 소리를 배울 때면 “세상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씨의 가게가 있는 대인시장에서 1㎞ 정도 떨어진 옛 전남도청 터에선 아시아문화전당 건립 공사가 한창이다. 1980년 5·18 광주항쟁 때 시민군들이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숨졌던 옛 전남도청과 주변 일대 14만㎡ 규모에 7000억원 이상이 투입돼 2014년 전당이 완공될 예정이다. 민주평화교류원, 아시아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아시아예술극장, 어린이문화원 등으로 구성된 아시아문화전당은 광주를 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씨에게 아시아문화전당은 심리적으로 멀게 느껴지는 콘크리트 건물일 뿐이다.

주부 박미옥(49)씨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딸 셋과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온 박씨는 지난 26일 일요일 ‘푸른연극마을’이 올린 <저 별이 위험하다!>라는 작품의 무대에 배우로 참여했다. 그는 1년 전 푸른연극마을 연극인 겸 연출가 이당금씨가 무료로 지도하는 주부연극교실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토요일 아침 몸 언어와 발성법 등을 배우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씨는 이번 무대에서 청소년 연극교실 고교생 10여명의 아마추어 배우들과 함께 제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박씨는 “사람들이 영화와 달리 연극을 관람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며 “진정 광주가 문화도시가 되려면 풀뿌리 문화에 물을 줘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맞는 지적이다. 많은 자치단체들이 문화를 통해 도시를 변화시키기 위해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웅장한 규모의 문화예술회관을 짓고 품격있는 외부 예술프로그램을 들여오지만,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문화전당이 완공돼도 시민들의 관심이 없으면 문화를 통한 도시재생은 힘들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민 문화예술 교육을 체계적으로 펼쳐 시민들의 문화적 감성을 북돋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리와 북장단을 배우는 국악 모임방이나 아마추어 밴드 모임, 연극·뮤지컬·그림 동호회 등의 활동을 지원하면 된다.

전업 문화·예술인들의 무대나 전시회를 찾는 이들은 대개 이들 아마추어 동호인들이다. 이들 동호인이 참여하는 ‘문화의 실개천’이 살아야 프로 예술인들이 펼치는 ‘문화의 바다’도 풍성해진다. 나는 엉뚱하게도 시민들이 아시아문화전당 개막식 메인 무대에 오르는 장면을 상상한다. 시장 상인들의 민요와 주부 연극단의 몸짓, 밴드 동호인들의 연주 등 시민들의 참여가 아시아문화전당에 활력을 불러오지 않을까?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시민들이 많은 도시가 문화도시다.

정대하 사회2부 호남제주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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