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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사다리’ 없는 디스토피아 / 강희철

등록 2012-08-29 19:08

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
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룬다는 글씨에, 실은 떡장수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이 서려 있었다는 <한석봉과 어머니> 이야기는 한 편의 성공 설화다. 서당은 고사하고 먹과 종이조차 마련할 길이 없어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 연습을 했던 그가 과거에 급제하고 당대의 명필로 우뚝 서는 스토리는, 양반의 핏줄임을 따지는 삭막한 ‘계급론적’ 해석을 잠시 접어둔다면, 공부(교육)가 계층 상승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부족함이 없다. 수백년간 구전돼온 비결도 그 어름에 있을 듯하다.

얼마 전 아이들 교육비를 대느라 빚까지 짊어진 이른바 ‘에듀푸어’(교육 빈곤층)가 82만가구를 넘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한국 부모들의 유별난 교육열을 칭송해 마지않은 오바마가 일찍이 이런 현실까지 알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가계적자를 무릅써가며 성공 가능성이 극히 낮은 사교육에 몰두하는 현상은 차라리 도박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 많은 가구가 같은 대열에 뛰어든 이면에는 절박한 불안감이 스며 있다.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자식 대엔 지금보다 훨씬 뒤처지리라는.

그런 의식의 일단은, 응답자의 무려(!) 98%가 “향후 중산층이나 고소득층으로 올라가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답한 또다른 조사 결과(<한겨레> 20일치)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98이라는 수치보다 훨씬 더 심각해 보이는 것은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딘 20대의 겨우(!) 3.7%만이 계층 상승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고교 졸업생의 80%를 넘는 전체 대학 진학자 가운데 60% 남짓(최근 교육과학기술부 통계)만이 ‘취업의 월계관’을 쓰고, 나머지는 구직을 단념한 채 주저앉거나 비정규직으로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미래가 분홍빛으로 보일 리 만무하다.

그들의 아버지 세대는 시골이나 달동네 출신이어도 고등교육만 받으면 타고난 처지를 뛰어넘을 길이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런 얘기는 압축성장기를 대변하는 ‘전설’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어느덧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철거됐고, 태어날 때의 격차가 곧 인생의 격차로 평생을 좌우하는 ‘계급 재생산’ 시스템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2008년부터 4개년 계획으로 진행해온 ‘교육과 사회계층이동 조사 연구’의 잠정 결론은 더이상 ‘한석봉’들이 나올 수 없는 이유를 거듭 확인해준다. “직업지위의 획득에서 교육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으며, 최근 출생집단으로 내려올수록 직접적인 경제력 이전 등을 통한 계급 세습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2010년 12월)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제자리이거나 퇴보하고 있고, 자식도 지금의 나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다고 믿게 된다면, 한 번의 실직이나 실패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을 의미한다면, 그들의 가슴을 채울 것은 절망감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마저 임계점에 다다른다면 다음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흔히 ‘철혈재상’이라고 알려진 비스마르크는 별명대로 주먹을 불끈 쥔 노동자들에게 탁자와 걸상을 권하는 대신 다짜고짜 곤봉을 들이대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그가 무슨 주판알을 튀겼는지 의료보험과 산재보험, 연금보험을 잇따라 도입한다. 1883~89년의 일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인류 역사상 처음 사회보험 제도를 시행한 지도자라는 영예를 안게 됐는데, 이때 남긴 말이 “국민의 행복을 존재 이유로 삼는 국가 스스로의 의무를 다하면서 국가 자체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는 치안 상태의 불안정성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혁명의 기회를 날렸다며 땅을 쳤다지만, 다른 누군가는 더 큰 피바람을 막았다며 안도했다.

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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