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권 논설위원
지난달 27일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성명을 냈다. 논문 표절과 공금 유용 의혹에 휩싸인 김재우씨가 <문화방송>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 연임된 것에 항의하는 내용이다. 으레 나오는 성명이라 생각하고 지나치려다 맨 마지막 문장에서 흠칫했다. ‘엠비(MB)정권하 지난 5년 동안 해고와 징계를 당한 언론인만 444명, 우리는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444명이라니? 박정희나 전두환의 독재 치하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언론인이 징계를 받을 수 있나? 언론노조에 요청해 구체적인 명세를 들여다봤다. <문화방송> 219명, <한국방송> 133명, <와이티엔> 51명, <연합뉴스> 13명, <국민일보> 20명, <부산일보> 4명, <에스비에스> 4명 등이 해고와 정직, 감봉, 경고 등의 징계(중복 징계 포함)를 받았다. 이 가운데 소유주가 없는 언론사에서 징계를 받은 사람이 420명으로, 전체의 95%를 차지했다. 정권이 사장을 사실상 임명하고, 그래서 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언론사에서 징계의 칼바람이 휘몰아친 것이다. 언론의 공정성 회복과 ‘낙하산 사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올 상반기에 노조가 총파업을 벌인 곳들이다.
‘444’는 한국 민주주의와 언론의 역사에 선명하게 새겨진 ‘정권 역주행’의 증표다. 이명박 정부는 21세기 언론자유의 시곗바늘을 1970~80년대 독재 시절로 되돌렸다. 단순히 징계 인원이 많아서가 아니다. 오늘의 문화방송 풍경이 그 이유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문화방송의 기자와 피디, 아나운서 등 20명은 서울 여의도 사옥 대신 잠실의 엠비시 아카데미로 향한다. 노조 파업으로 1개월 정직 또는 대기발령을 받았던 이들이다. 회사 쪽은 징계가 끝나자마자 다시 3개월의 교육을 명령했다. 입사한 지 30년이 넘는 최고참급 언론인이 그곳에서 샌드위치 만들기를 배우고, ‘종교와 나’ ‘시와 철학’ 같은 강좌를 듣는다. 전두환 신군부가 사회정화를 이유로 4만명가량을 강제로 순화교육한 삼청교육대나 진배없다. 육체적 학대보다 오히려 더 잔인한, 지성의 굴종을 강요하는 가혹행위나 마찬가지다.
하루 내내 여의도 사옥의 보도국 천장에선 12대의 고성능 시시티브이가 기자들의 일상을 체크한다. 파업기간인 5~7월에 갑자기 설치된 시시티브이다. 회사 쪽은 도난방지용이라고 설명하지만, 감시용이라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1970년대 유신 시절에 신문·방송사에 무시로 들락거리며 언론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눈길이 떠오른다. 그때와의 차이는 ‘낙하산 사장’이 정보기관 대신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칠까.
이런 탓에 ‘444’는 이 땅 사람들의 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재는 가늠자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이고, 민주주의의 핵심 토대가 언론자유임을 아는 이라면 엠비정부의 언론장악과 탄압을 모른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19대 국회의 개원 합의사항이었던 국회 문방위 언론청문회는 새누리당의 외면으로 개최가 요원하다. 1970~80년대도 아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언론탄압을 외면하는 정치세력은 민주주의 훼손의 방관자임이 분명하다. 아니 사실상의 동조자로 불려야 옳다.
일찍이 미국의 정치가 토머스 제퍼슨은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로 새로워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말을 대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로 바꿔 얘기한다. 언론인 444명의 희생은 분명 민주주의 신장의 밑거름일 테지만, 그래도 그들이 겪는 고통이 너무 가슴아프다.
정재권 논설위원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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