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혁 경제부 기자
약 8년 전 마포경찰서 출입기자 시절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을 취재했다. 잠복근무(?) 끝에 유씨의 어머니를 만나 짧게나마 인터뷰한 일과 신촌로터리 근처 유씨가 살던 원룸을 찾았다가 욕실 천장과 벽에 튄 핏자국을 발견하고 모골이 송연해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형사 두 명이 마스크에 모자까지 푹 눌러쓴 유씨를 양쪽에서 팔짱낀 채 기동수사대 현관에 나타났다.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형사들이 기자들을 밀어내며 호송차 쪽으로 길을 냈다. 그때 갑자기 유씨가 쓰고 있던 모자가 저 멀리 날아갔다. 누군가 손으로 모자를 세게 쳐낸 것이었다. 유씨는 머리를 더욱 깊숙이 숙였고, 형사들은 황급히 유씨를 호송차로 이끌었다.
호송차가 떠난 뒤 기자들은 서로 바라보며 어이없어했다. ‘도대체 누가 왜 모자를 쳐냈지?’ 나중에 한 방송사 수습(또는 수습을 갓 마친) 여기자가 벌인 일로 확인됐는데, 기자들 대다수는 ‘얼굴 확인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빛바랜 기억 속 사건이 다시 떠오른 건 <조선일보>의 일곱살 여자아이 성폭행범 사진 오보 때문이다. 현직 대통령을 ‘전 대통령’이라고 하거나 몇년 전에 찍은 사진을 당일 사진인 양 보도하는 행태를 봐왔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피의자 얼굴 공개가 오보의 위험을 감수하고도 그렇게 시급하게 다뤄야 하는 사안인가?
피의자 인권,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얼굴 공개는 피의사실 공표이자 초상권 침해일 수 있지만, 선진국에서도 흉악범의 경우엔 금세 공개되기도 한다. 절대적인 원칙이 있다기보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운용된다는 얘기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몇년새 부쩍 심해진 몇몇 매체의 얼굴 공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하고, 주변사람 인터뷰와 전문가 분석을 통해 그의 신상을 턴다고 범죄가 줄어들고 예방되지 않는다.(신상과 얼굴이 제대로 털린 ‘유영철 사건’ 뒤에도 정남규·강호순·김길태·조두순 등 흉악범들의 행진은 계속됐다.)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사진을 보며 ‘에잇,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하는 것 말고 뭐가 더 있을까. 여론은 얼굴 공개를 지지한다고? 평소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이나 인터넷의 선정주의를 두고 입에 거품을 무는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볼 일이다. 제 편리할 때만 ‘대중’을 들이대는 것은 위선이다.
더 큰 문제는 얼굴 공개와 과도한 신상털기에 집착할수록 범죄의 구조적 요인과 재발 방지 대책 등 이성적 접근과 차분한 분석이 필요한 대목에는 소홀해진다는 점이다. 대중의 관심이나 정부의 대응에도 일정 부분 총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경기 수원에서 귀가하던 20대 여성이 납치돼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아동 성폭행 사건 못지않게 국민적 관심이 모아졌지만, 그 제도적 귀결은 어떠했나? 본인 동의 없이도 경찰이 위치추적 결과를 통신사로부터 넘겨받을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을 뿐이다. 피해 여성은 위치추적에 동의했으나 경찰이 소홀하게 대응해 벌어진 참극이었지만, 분노에 들뜬 여론은 이것저것 차분히 따져보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불심검문 재개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가.
얼굴 공개와 과도한 신상털기 다음엔 으레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일 것이다. 그 바탕에는 문제적 인간은 철저히 골라내 이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는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냄비여론을 선동하는 ‘범죄 포퓰리즘’ 언론들이 모르는(혹은 외면하는) 진실이 있다. 아무리 잘 골라내도 공장이 그대로면 불량품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경험칙 말이다.
이순혁 경제부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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