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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분노에 앞서 / 강성만

등록 2012-09-12 19:25

강성만 문화·스포츠 에디터
강성만 문화·스포츠 에디터
지난해 11월 <뉴욕 타임스> 기자 넷은 미식축구 코치에게 수년간 성추행을 당했다고 증언한 한 학생의 주변 인물 수십명을 인터뷰해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만남 그리고 성범죄로 이어지는 과정이 제법 생생히 그려졌다.

가해자가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는 사건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기사는 그러나 뜻밖의 역풍을 만났다. 피해자 쪽에서 반발했다. 기사에 이름이나 구체적인 신상정보는 없지만 피해자가 누군지 알려질 수 있는 정보가 담겼다는 이유에서다.

신문의 시민편집인(옴부즈맨) 아서 브리즈번도 피해자 쪽 주장에 동조했다. 기사엔 피해 학생이 수년 전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했으나, 이런 시련을 극복하고 운동선수로 당당히 재기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지역 신문에 소개됐다. 인터넷 검색으로 이 기사를 찾으면 학생이 누군지 알 수 있다고 브리즈번은 지적했다.

신문의 담당 에디터는 기사의 신뢰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최대한 소년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려 했다고 해명했지만, 시민편집인은 독자의 흥미 충족과 피해 학생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게 프라이버시 침해의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비판의 요점은 명확하다. 성범죄 피해자의 신원은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이상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게 바로 성범죄 희생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이 분야 전문가들은 공통으로 지적한다. 언론의 사려 깊지 못한 과잉보도가 오히려 성범죄 신고를 막고 희생자를 더 늘릴 수 있는 것이다.

상상하기 힘든 고통에 괴로워할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그들의 신상정보가 알려져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한쪽 편에만 서지 않는다. 공개되는 정보를 통해 피해자 쪽도 문제가 없는지 살필 것이다.

한국의 한 신문은 최근 위성사진으로 어린이 성폭행 피해자의 집 위치를 노출했다. 이 집의 외관 사진까지 여러 신문에 실렸다. 맘만 먹으면 피해 아동과 가족이 누군지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가족 중 한 명의 다소 특별하게 보일 수 있는 행적이 신문 제목으로까지 뽑혔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이 구성원에 대한 연관 검색어도 여럿이다. 가족이 지금 살던 곳에서 계속 머물 수 있을까?

언론이 잔혹한 범죄에 분노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분노가 피해 가족의 피눈물을 짜내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 분노를 지우는 게 낫다. 한 신문은 어린이 성폭행 피의자 가족을 취재한 기사를 인터넷에 올리면서 버젓이 ‘○○의 충격고백, “내가 자고 있는데”’라고 지면과는 동떨어진 제목을 달았다. 타인의 고통에 벽을 치는 그 ‘담대함’에 전율했다. 타인의 불행이 좋은 돈벌이가 될 수도 있다고 여기는 그 발상에 할 말을 잃었다.

한국 언론에 범람하는 성범죄 가해자의 인적 정보는 피해자의 신원 노출 가능성을 키우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영국의 언론고충처리위원회(PCC)가 언론윤리규약에서 아동 성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관계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정보를 기사에 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피해자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무엇보다 앞서야 한다는 뜻이다. 성범죄자 응징이 피의자 인권 보호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피해자 신원이 노출되지 않도록 더욱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쉽게도 한국의 언론에서 아직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날 선 분노가 뚝뚝 떨어지는 보도에 앞서 피해자와 가족이 나와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을 먼저 떠올렸으면 한다.

강성만 문화·스포츠 에디터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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