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숙 여성환경연대 환경건강팀장
10년쯤 전, 캐나다를 여행하던 호시절에 ‘핑크리본’ 캠페인을 처음으로 접했다. 지금이야 서울시청을 핑크빛 조명으로 물들이는 유방암 캠페인이 흔하지만 그때는 요술공주 세리처럼 핑크빛 천사 날개를 달고 핑크빛 알사탕을 나눠주던 발랄한 캠페인에 놀랐다. 한국 여성으로서 유방암보다는 유방 확대수술에 귀가 더 솔깃했는데, 우리는 30명 중 1명이 유방암에 걸리는 반면 서구에서는 8명 중 1명이 유방암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유방암 발생률은 낮지만 그 증가율은 서구의 20배에 이른다. 이제 우리도 ‘왜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우리 엄마들 세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방암에 많이 걸릴까’를 고민하는 처지가 되었다.
유방암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보통 유전적 요인, 개인의 재생산력, 생활습관이 지목된다. 유방암에 걸리기 쉬운 유전자, 빠른 초경, 늦은 완경, 출산과 수유의 개인차, 서구식 식습관, 비만 등이 유방암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방암 유전자는 10~15% 정도밖에 책임이 없으며, 생활습관 요인은 유방암 원인의 30%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50%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점점 많은 연구들이 이 50%가 어쩌면 우리 사회 자체에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유방암 발생률이 낮은 아시아 여성이 유방암에 많이 걸리는 서구로 이민을 가면 그들의 유방암 발병률이 증가하고, 이민 가서 산 기간이 길수록 유방암에 걸릴 위험도 높아진다. 일란성 쌍둥이도 서로 떨어져 살 경우 암에 걸릴 가능성은 입양 가족과 5배나 높은 관계를 보인다. 원인이 우리 사회에 있다는 의미는 ‘먹고 마시고 숨 쉬는 것들’에서 암이 기어 나온다는 뜻이고, 또한 예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뜻도 된다.
올해는 살충제로 죽어버린 숲을 이야기한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 나온 지 50주년 되는 해다. 그는 유방암으로 비대해진 종양이 신경을 눌러 오른손을 움직이기 힘든 지경에서 그 책을 썼다. 유방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유해화학물질을 경고했던 그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면 바퀴벌레처럼 퍼진 화학제품이 눈에 띈다. 로션, 샴푸, 염색약, 매니큐어, 모기약, 방향제, 합성세제, 살충제, 농약, 일회용 플라스틱 등이 말이다.
일부 화학제품은 유방암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을 모방하는 내분비계 교란물질(환경호르몬) 역할을 한다. 화장품에 들어 있는 파라벤, 향수나 방향제, 일부 플라스틱에 들어 있는 프탈레이트, 드라이클리닝 성분, 가구나 가전제품이 타지 않도록 첨가되는 난연제 성분, 동물에게 투여되는 유전자조작 성장호르몬, 농약과 살충제, 자동차 배기가스 성분이 의심을 받는다. 실제로 국내에서 유방암 환우와 비환우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매니큐어나 청소용 세척제의 잦은 사용, 거주지 근처의 큰 도로나 버스 터미널, 야간에 일한 경험이 유방암과 관련이 있다고 나왔다.
10월은 유방암 예방의 달이다. 핑크리본 캠페인의 유방암 조기검진과 핑크빛 이벤트도 좋지만 1차 예방은 병을 빨리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병에 안 걸리는 것이다. 때로는 달콤한 위로보다 아픈 분노가 힘이 된다. “8만종의 합성화학물질 중 발암성 검사를 받은 물질은 약 2%뿐이며, 1976년 이후 정확히 5종의 물질만이 금지됐다”는 미국 상황이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다. 유방암 예방의 달에 레이철 카슨을 다시 생각한다.
고금숙 여성환경연대 환경건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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