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권 논설위원
김재철 문화방송(MBC) 사장에게 오늘은 평생에서 가장 길고 곤혹스런 날이겠구나, 생각했다. 지난 12일의 일이다. <한겨레>는 이날 이진숙 엠비시 기획홍보본부장과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이 만나 장학회가 보유한 엠비시 지분의 매각 문제를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불과 나흘 전인 8일 최 이사장 방에서 비밀리에 오간 ‘천기’가 누설됐으니 막후 지휘자 김 사장은 ‘멘붕’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게다.
다음날 김 사장이 꺼낸 카드는 ‘도청’과 ‘고발’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고육책이다. 음모론을 동원한 물타기 시도이자 ‘입막기용’ 압박이다. 하지만 이건 헛발질에 불과했다. 엠비시와 일부 보수언론을 빼곤 다들 ‘도청 의혹’에 시큰둥하다. 무엇보다 <한겨레>가 15일치에 밝힌 대로 대화록은 불법적인 도청의 결과물이 아니다. 나중에 취재과정이 공개되면 “계획에서 이행에 이르기까지 가담한 이들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10월13일, ‘정수장학회 기사 관련 엠비시 입장’)고 목소리를 높인 김 사장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질 것이다.
김 사장의 지금 처지는 안쓰러울 정도다. 쫓기던 타조가 머리는 덤불에 처박았으나 꼬리를 미처 숨기지 못해 쩔쩔매는 ‘장두노미’(藏頭露尾) 신세나 다를 바 없다. 이번 대화록으로 김 사장이 숨기려 했던 진실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김 사장 체제의 엠비시는 국민의 알권리를 지키는 ‘감시견’이 아니라 여권 후보의 당선에 몸이 단 애완견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 본부장은 최 이사장이 지분 매각 방침을 발표할 기자회견에 대해 “(기자회견) 그림은 괜찮게 보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게 굉장히, 말하자면 정치적으로도 임팩트가 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치적 임팩트’라는 발언에는 언론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선 엠비시의 맨얼굴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그렇지만 잠시나마 김 사장을 딱하게 생각한 건 순진한 착각이었다. 엠비시의 뻔뻔함은 상상력의 범위를 뛰어넘었다. 김 사장은 15일 내놓은 특보에서 “엠비시의 지분 매각 협의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한다.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민영화’를 검토했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니, 더구나 김 사장이! 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엠비시 노조가 지난 1월부터 170일 동안 파업을 벌인 첫째 이유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하지만 김 사장이 지난 7월 파업을 끝낸 노조에 되돌려준 것은 독립은커녕 150명이 넘는 기자·피디·아나운서에 대한 가혹한 징계였다. 대기발령이나 정직 1~2개월의 징계를 받은 80여명은 이미 일터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12월까지 교육이 연장됐다. 12월19일의 대선 투표일까진 일을 맡기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다.
지분 매각의 논리를 이것저것 갖다대는 것이야 김 사장의 자유이지만, ‘권력으로부터의 독립’만큼은 그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엠비시의 공공성과 공정성 회복을 바라는 국민 열망을 모욕하는 행위다. 파업이 끝난 지 두달 뒤인 9월에 수도권에서 엠비시 메인 저녁뉴스(‘뉴스데스크’)의 주중 평균 시청률은 6.9%로 <한국방송> ‘KBS 뉴스 9’의 21.4%, <에스비에스> ‘SBS 8 뉴스’의 12.8%에 크게 못미쳤다. 에스비에스 시청률의 반토막일 정도로 엠비시가 국민들한테서 외면받은 것은 바로 김 사장의 ‘권력에 대한 굴종’ 때문이었다. 지금 김 사장이 할 일은 적반하장으로 ‘독립’을 들고 나설 게 아니라 엠비시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굴종’을 참회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정재권 논설위원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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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철 (MBC) 사장(앞)이 지난달 6일 서울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 사무실에서 열린 이사회에 업무보고를 하러 들어가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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