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스포츠부 기자
지난 4월의 일이다. 제이(J)가 뜬금없이 말했다. “한적한 바닷가에 가서 낚시나 하면서 살고 싶어요.” 곁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폭소했다. 그리고 핀잔 섞인 구박을 마구 해댔다. 제이의 나이는 아직 20대 중반. 낙향이나 혹은 귀농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테니스 국가대표선수였다.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 오스트레일리아(호주)와의 일전을 앞두고 바닷가 낚시 타령을 하고 있으니 그 분위기가 짐작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농담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제이는 경기가 없는 날 하얀 모자와 깔끔하게 다려진 정갈한 옷, 그리고 하얀 운동화를 신고 외출했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제이의 뜬금없는 소원도 언뜻 수긍이 간다. 당시 군복무 중이던 그는 제대를 하면 ‘테니스’로 먹고사는 생업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데이비스컵에서 세계 30위권 선수의 간담을 서늘케 했지만 세계무대는 언감생심이다. 국외 투어를 다니려면 1년 2억~3억원은 족히 소요되기 때문이다. 든든한 후원사가 없는 상황에서 자비를 들여가며 투어를 다니기란 쉽지 않다. 언어 장벽과 시차 적응 등도 문제가 된다. 테니스 선수들이 ‘바깥’보다는 ‘안쪽’에 눈길을 돌리는 이유다. 현실에 좌절하며 “나달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거나 “페더러처럼 뛰고 싶다” 하는 꿈은 점점 깨진다.
테니스 취재 도중 만난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소속 에드 하디스티 감독관(슈퍼바이저)의 말은 더욱 구체적이다. “한국 선수들은 주니어 시절에는 세계적 수준의 경기를 펼치지만 프로에 들어서는 성장을 멈춘다. 아무래도 국내 실업팀에 속하다 보니 국내 경기 위주로만 뛰어 국제 경험이 부족한 영향 아닌가 싶다.”
시청·군청 소속 테니스 선수들은 보통 남자 3500만~7000만원, 여자 3000만~500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 2~5년 사이의 계약 기간이 끝나면 수천만원의 계약금도 별도로 챙긴다. 실업팀에 속하다 보니 도민체전·전국체전 성적이 으뜸 기준이 된다. 국제무대는 물론 꿈꿀 수 없다. 삼성증권·한솔 등의 후원을 받는 선수도 있지만 극히 일부다. 한 대학 감독은 “능력 있는 선수들은 배고파하지 않는다”며 선수들의 열정 부족을 탓한다. 하지만 일반 사회가 그렇듯, 열정도 ‘먹고사는 일’ 앞에서는 사치가 된다.
테니스 4대 메이저대회 중 하나인 롤랑 가로스(프랑스오픈) 공식누리집은 올해부터 프랑스어, 영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서비스도 하고 있다. 리나(세계 7위)가 작년 대회 여자 단식에서 우승한 영향이 컸다. 현재 여자프로테니스(WTA) 투어 세계 100위권에는 리나 등 3명의 중국 선수가 포함돼 있다. 일본도 모리타 아유미가 77위에 올라 있다. 200위권 이내 선수도 7명이나 된다. 하지만 한국은 세계 순위가 가장 높은 여자 선수가 273위(한성희)다. 남자 선수를 봐도 일본은 니시코리 게이(19위) 등 3명이 100위 안에 있다. 한국 남자 테니스 최고 순위는 정석영(건국대·336위). ‘열정 부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큰 차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대한테니스협회는 올해부터 선진 육성 시스템을 가동했다. 외부 도움이 절실하다.
우물 안 개구리가 돌에 맞아 죽을 확률은 극히 적다. 다만 바깥세상과의 단절로 점점 도태된다. 그렇다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개구리만 탓할 일도 아니다. 프로야구는 한 경기당 메리트(보너스)로만 1억원을 쓰는 그룹이 있다고 한다. 테니스와 함께 개인 스포츠 양대 산맥을 이루는 골프에서는 선수와 기업 간의 후원 소식도 심심찮게 들린다. 주니어 우승 소식만 들릴 뿐 이후 투어 성적 소식은 감감한 테니스도 관심이 필요한 때다.
김양희 스포츠부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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