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말과 소통은 담론으로 발전하고, 담론은 생각의 틀이 돼 거꾸로 말과 소통의 질을 구속하는 힘을 갖는다. 선거 때일수록 담론이 주목받는 까닭이다. 이번 대선에선 어떨까?
우선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왜곡된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후보 자질 담론’이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이 문제는 박정희 독재정권 체제에 대한 박 후보의 태도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그가 분명하게 과거와 결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후보 자질 담론은 앞으로도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박 후보 쪽이 신종 ‘북풍 담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의혹을 끈질기게 제기해온 것도 후보 자질 담론에 물타기를 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하지만 근거가 취약한데다, 연평도 포격 사건에서부터 최근 북한 병사의 ‘노크 귀순’에 이르기까지 안보 불안을 심화시켜온 게 바로 새누리당 정부였기 때문에 금세 한계를 드러냈다.
경제 분야는 ‘민주화·일자리 담론’으로 틀이 굳어지고 있다. 2007년 대선 때 ‘성장·개방 담론’이 지배적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다. 이런 변화는 중층적인 양극화와 고용난, 기존 경제 모델의 활력 저하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렇지만 경제민주화의 내용과 일자리 창출의 방법론에서는 선명한 구도가 그려지지 않고 있다. 야권은 경제민주화의 한 부분인 재벌 개혁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여권은 민주화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채 담론의 질을 희석시키고 있다. 경제 분야 담론은 항상 선거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여야 모두 좀더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내용을 채워나가는 것으로 국민의 요구에 답해야 한다.
교육·노동·복지·치안·지역 문제와 사회적 약자 문제 등을 포괄하는 사회·문화 분야에서는 복지 강화를 중심으로 담론이 형성된 상태다. 2007년 대선 때 여러 분야의 시장화·민영화 주장이 힘을 발휘했던 것과 대비해 ‘공공성 담론’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바람직한 변화다. 하지만 복지에만 논의가 집중되면서 다른 분야는 이전보다 오히려 소홀히 다뤄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복지 담론을 큰 틀로 하되 다른 여러 사안을 별도의 담론으로 부각시켜 나가길 기대한다.
정치 분야에서는 개혁·통합 담론이 떠오르고 있지만 그 내용은 아직 빈약하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어제 내놓은 정치혁신 구상이 본격적인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 야권 후보 단일화 담론은 정치적 불확실성을 줄이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선거 결과에만 초점을 맞춘 논의는 구태의연하다. 이 담론은 후보들 개인의 진퇴 문제가 아니라 국민적 에너지를 통합하고 확장하는 차원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담론은 체제 담론과 직결된다.
이번 대선은 한반도·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지구촌 차원에서 새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시기에 치러지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체제 담론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함에도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래서 여러 담론이 하나의 큰 틀로 엮이지 않고 미래의 모습이 한눈에 잘 보이지가 않는다.
지금은 흙이 내려앉고 기와가 무너지는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시기다. 문패나 바꿔 다는 미봉책으로는 안 된다. 세상은 바뀌어야 하며, 충분히 바뀔 수 있다. 후보들은 자신이 어떤 체제를 지향하는지 쉽고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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