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철 사회2부 수도권팀장
나는 1986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왔다. 서울에 오기 전 19년 동안 부산과 울산에서만 살았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대학을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지금은 경상도 사투리가 꽤 탈색됐지만, 26년 전 내 말투는 표준말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사투리 그 자체였다.
처음 만난 서울 출신 친구들은 내 말투를 듣고선 대뜸 “시골에서 왔구나”란 반응을 보였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내 고향 울산은 인구 규모로 치면 전국에서 7번째로 큰 도시다. 그런데 시골이라니? 그때까지 내 상식으론 시골이라 함은 읍면 이하 단위의 궁벽한 농촌, 산촌, 어촌을 칭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골이 아니고 울산에서 왔다”고 반박하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 사람은 서울을 뺀 나머지 지역은 모두 시골로 인식하고 있었다. 서울 사람에겐 대구나 대전, 광주, 부산, 울산 등은 아무리 인구가 많고 행정구역상 ‘광역시’라도 그냥 시골에 불과했다.
20대 후반 취업을 준비할 때 서울 출신 친구들은 한사코 서울에 있는 직장만을 고집했다. 어쩌다 직장을 따라 서울을 벗어나는 친구들은 무슨 귀양살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비장하게 굴었다.
헌법재판소가 지난 2004년 ‘대한민국 수도=서울’이라는 ‘관습헌법’을 이유로 행정수도특별법에 위헌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서울을 뺀 나머지 지역은 시골’이란 낡은 인식도 한몫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나 알듯이 정치·사회·문화 등 곳곳에서 중앙(서울)-지방(시골)이란 이분법적 사고가 뿌리깊다. 사전을 펼치면, ‘지방’은 중앙의 지도를 받는 아래 단위의 기구나 조직을 중앙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돼 있다.
이와 달리 ‘지역’은 자연적 또는 사회적, 문화적 특성에 따라 일정하게 나눈 지리적 공간을 뜻한다. 지방과 달리 지역은 서울의 하위 개념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서울도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한 지역일 뿐이다. 이 때문에 서울 집중의 폐해를 극복하고 지역균형발전과 지역등권을 논의할 때 ‘지역’이란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지방’이란 용어를 안 쓴다.
제18대 대통령선거를 40여일 앞두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전국을 순회하며 지역 표심을 잡느라 애쓰고 있다. 이들은 지역을 방문할 때 각종 지역 개발 현안들을 언급하고 지역균형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북방한계선 논란, 야권 후보 단일화 등에 밀려 지역균형발전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후보들의 지역균형발전 공약이나 정책도 빈약하다.
박근혜 후보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수도권과 지방 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지만, ‘어떻게’ 만들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문재인 후보는 균형발전을 강조한 참여정부의 지역정책을 계승했지만 참여정부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숙제도 안고 있다. 안철수 후보는 ‘지역 격차 해소’를 중요한 공약으로 제시하고서도 아직 뚜렷한 지역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공자는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고 했다. 이른바 정명론이다. ‘정치를 한다면 이름부터 바로잡겠다’는 공자 말씀을 빌려, 박근혜 후보, 문재인 후보, 안철수 후보에게 부탁 하나 한다. 누가 집권하더라도 차별적 의미가 내포된 지방 대신 가치중립적인 의미가 담긴 지역을 행정용어로 사용했으면 좋겠다.
만약 공문서에서 지방이란 용어가 사라지면, 앞으로 공무원 회식 자리에서 사회자가 ‘지방방송 끄라’는 말 대신 ‘지역방송 끄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권혁철 사회2부 수도권팀장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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