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무 논설위원
농업인의 날이자 빼빼로데이인 11월11일의 한 장면은 기억될 만하다.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박근혜 후보의 부름을 받고 약속 장소로 갈 때만 해도 한 가닥 기대를 품었다. 이전에 둘이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경제민주화 요구에 대해 박 후보가 약속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확약을 받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박 후보는 혼자가 아니었다. 김종인식 경제민주화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핵심 측근 9명을 대동하고 나왔다. 얘기를 듣자는 쪽도 아니었다. 김 위원장이 확정되지 않은 공약을 흘리고 재벌의 로비가 심하다고 말한 데 대한 질책과 경고의 자리였다. 김 위원장의 소신발언은 메아리 없는 독백에 그치고 말았다. 혹시나 했던 김 위원장과 그의 경제민주화는 합리성·민주성은 물론 여성성이 결여된 그날 그 자리에서 9 대 1의 머릿수만큼 완패를 당했다.
새누리당은 김 위원장이 추구한 순환출자 규제와 대기업집단법을 거부함으로써 친재벌 본색을 드러냈다. 숫제 재벌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총수와 지배구조 문제를 당내 금칙어에 포함시킨 것이다. 문제는 경제민주화로 국민행복을 이루겠다고 한 박 후보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개혁일 수밖에 없다. 불공정거래와 경제 양극화의 정점에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지배 확장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박 후보는 미래가 아니라 눈앞의 선거를 위해 김 위원장을 중용하고 경제민주화를 내세웠다는 비난에 휩싸여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박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가장 잘할 대통령으로 꼽혔던 게 씁쓸함을 더한다.
김 위원장과 맞닥뜨렸던 순환출자에 대한 박 후보의 설명은 궁색하다. 박 후보는 첫째 기존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으려면 몇조원씩 들어가는데 그보다는 대기업이 이를 투자와 일자리에 쓰는 게 도움이 된다, 둘째 기존 순환출자는 당시 합법적으로 허용된 것이어서 소급 적용은 문제가 있다고 한다. 순환출자에 대한 재계의 아전인수격 논리를 받아적은 것이다.
순환출자는 갑이 을에, 을이 병에, 병이 다시 갑에 꼬리를 물고 투자하는 식이다. 그 덕에 재벌은 손쉽게 계열사를 늘리고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내부거래와 일감 몰아주기를 해왔다. 또한 재벌 총수들은 소액주주들이 투자한 돈으로 경영권을 누리고 소액주주들은 그만큼 권리를 침해받아 왔다. 박 후보의 말은 재벌들이 순환출자로 부당하게 쌓은 기득권을 인정해주자는 것이다.
외환위기 당시 현대자동차 사장으로 외자유치를 위해 발품을 팔았던 이계안 전 의원은 기업설명회에서 자주 나온 질문이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소수 지분으로 기업의 경영권을 가진 주주와 일반 투자자들 사이의 이해 상충 문제였고, 다른 하나가 순환출자 문제였다. “순환출자 구조에서는 소속 계열사에만 자원배분이 집중돼 시장이 왜곡되고, 한 기업이 부실화할 경우 다른 계열사까지 동반 부실화할 수 있는데, 이런 심각한 문제를 언제까지 해결할 것인가?”
여전히 덮고 가자고 한다. 재벌 기업이 아니라 재벌 총수를 걱정해주기 바쁜 탓이다. 순환출자는 실물자원의 투입 없이 가공의 의결권을 창출한 것이어서 해소하는 데 큰 부담이 없다. 남의 돈으로 경영권을 누리고 있는 재벌 총수들이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는 데 돈이 들 뿐이다.
재벌개혁은 치밀한 로드맵을 갖고도 하다 보면 저항이 심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처음부터 재계가 싫어하는 소유·지배구조 문제를 눈감아주겠다는 것은 장기판에서 차포를 떼는 격으로 그냥 접어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감 몰아주기나 불공정거래를 바로잡겠다는 약속도 기준이 슬그머니 완화되고 예외 조항이 늘어나면서 빈말에 그칠 공산이 크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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