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안철수
안철수는 약속을 지켰다. 단일화 문제로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던 출마선언을 이행했다. 후보등록 이전까지 단일화를 하겠다던 시한도 어기지 않았다. 그가 사무실을 ‘진심캠프’라 이름짓고, ‘선의가 가장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 한다’고 했을 때, 유치하고 순진한 발상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제법 있었다. 안철수는 단일화가 위기에 빠지자 연연하지 않고 후보직을 내려놓았다. 비웃던 이들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기존 정치인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비록 출마선언 66일 만에 뜻을 접었지만 그는 이제 누구보다 풍부한 자산을 지닌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아름다운 패배자, 지고도 승리한 정치인이 되었다.
안철수의 패배는 문재인에게 위기로 작용하고 있다. 문재인은 단일화를 놓고 안철수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통 큰 모습을 보이며 던지고 양보했다. 그가 초반 열세를 뒤집은 것도 이런 모습이 국민에게 인상깊게 투영된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협상 막바지에 그는 집착하는 사람으로 비쳤다. 억울할 수도 있겠다. 여론조사라는 방식 자체를 받아들였으면 됐지 세부 문항까지 양보하라는 건 너무하지 않으냐는 항변은 일리 있다. 10년 전 노무현을 되돌아보자. 이회창, 정몽준에 이어 여론조사 3위였던 노무현은 자신에게 유리한 경선 방식을 먼저 포기하고 여론조사 단일화를 수용했다. 참모들이 완강히 반대하자 “하루 밤낮이면 천하가 세 번은 바뀐다. 내가 패배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정권 재창출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약자의 양보’라는 감성적 승부수는 노무현을 야권 단일후보를 넘어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번에 양보하고 던지고 버린 사람은 문재인이 아니라 안철수로 비쳤다.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문재인은 승리했지만 상처를 입었다. 문재인은 지금 위태로운 승자다.
승자 문재인의 위기가 패자 안철수로부터 돌파구가 열린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략 안철수 지지층의 50%는 문재인 쪽으로, 20~25%는 박근혜 쪽으로 이동하고 나머지 20~25%는 부동층으로 남는다. 머뭇거리고 있는 안철수 지지층을 끌어오지 않으면 문재인의 승리는 어렵다는 점이 명확하다. 사퇴한 안철수가 대선의 열쇠를 쥐고 있는 형세다.
안철수는 문재인을 도울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이 이기면 그 승리는 안철수의 것이 된다. 안철수가 죽기 살기로 도왔는데도 문재인이 진다면 그 패배는 문재인 몫이다. 안철수에겐 또다른 기회가 올 것이다. 안철수가 방관자로 남았는데 문재인이 승리한다면 그 승리는 문재인의 것이다. 안철수가 방관자로 남아서 문재인이 진다면 그 패배엔 안철수의 몫도 들어 있다. 방관자 안철수에겐 기회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의 기회는 문재인을 통해서 열리게 된다.
문재인은 25일 “안철수 후보가 갈망한 새 정치의 꿈은 우리 모두의 꿈이 됐다. 그 힘으로 정권교체와 새 시대를 만들어내겠다”고 했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이런 추상적인 얘기를 뛰어넘는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그 무엇일 것이다. 안철수 지지층 가운데 문재인 지지를 주저하는 이들은 안철수를 좋아하지만 민주당은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안철수는 이들을 정치쇄신세력, 민주당 지지층을 정권교체세력이라고 지칭했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이 두 세력을 한데 묶어낼 연대 틀로 ‘국민연대’라는 걸 합의한 바 있다. 이를테면, 국민연대를 발전시켜 대선 이후 정권교체세력과 정치쇄신세력을 아우르는 새 정당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안철수가 그 주축이 되도록 하는 방안도 있다. 안철수에게 정치쇄신의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통 큰 조처가 나오지 않으면 문재인의 위기는 쉽게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임석규 정치부장 sky@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박근혜 문재인도 선택안한 ‘안철수표’ 22%가 대선승부 가른다
■ “안철수에서 박근혜로 전향한 척하자”
■ MBC와 SBS ‘대선 여론조사’ 결과 다른 이유
■ 박근혜 앗! 실수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
■ 블록이 플레이스테이션보다 더 좋아~
■ 27일 안철수 캠프 해단식…어떤 메시지 나올지 촉각
■ 예의 없는 학생, 그들이 내 스승
임석규 정치부장
■ 박근혜 문재인도 선택안한 ‘안철수표’ 22%가 대선승부 가른다
■ “안철수에서 박근혜로 전향한 척하자”
■ MBC와 SBS ‘대선 여론조사’ 결과 다른 이유
■ 박근혜 앗! 실수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
■ 블록이 플레이스테이션보다 더 좋아~
■ 27일 안철수 캠프 해단식…어떤 메시지 나올지 촉각
■ 예의 없는 학생, 그들이 내 스승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