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수 강출판사 대표·문학평론가
말과 사물이 맞물려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대개 우리는 사물 쪽으로 부등호가 큼지막하게 열려 있으려니 짐작한다. 아무리 작고 단순한 사물 혹은 사안이라 하더라도 유동하고 변전하는 무수한 요소의 복합체일 텐데, 그 앞에서 말은 언제나 작고 잠정일 수밖에 없겠으니 말이다. 우리는 말이 아주 조금밖에는 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부등호는 반대쪽으로도 열려 있다. 자유나 사랑 같은 말을 생각해보자. 그런 말들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고 인지하는 자유나 사랑의 분량 이상의 것이 담겨 있기 쉽다. 그렇다면 말은 언제나 ‘더’이거나 ‘덜’인지도 모르겠다. 말과 사물 사이의 그 벌어진 틈새 언저리에서 무언가를 찾아온 문학의 역사는 깊다.
이젠 한갓 추억담 같은 게 되었지만, 주제와 소재를 적바림해서 외우는 것으로 소설이나 시의 이해를 급하게 대신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요약이 불가능하기 때문일까, 작가들은 흡사 말을 낭비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한가하게 계절이나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먹고 자고, 만나고 헤어지는 일상다반사를 시시콜콜 늘어놓고도 빙빙 에두르고 있기가 일쑤다.
이른바 상대가 상대인 만큼 ‘맞짱뜨기’는 애당초 문학이 감당할 수 있는 노선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황석영의 근작 장편 <여울물 소리>(2012)에 나오는 동학의 지도자 서일수라는 인물의 태도에는 문학이 그러루하게 취해올 수밖에 없었던 어떤 궁색한 방책을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서씨는 세태에 대하여 비분강개하거나 정면으로 맞서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시정 왈짜와 다름없이 아랫것들과 한통속이 되어 풍도 치고 능청스럽게 덜미도 잡으면서 휘돌아 나아갔다.” 환속한 승려 출신으로 동학에 입도하여 삼례집회와 우금치전투를 주도했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끝내 체포되어 처형된 서일수의 일생은 오히려 비분강개로 넘쳤고, 불의한 세상과 정면으로 맞섰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장함의 열도를 지키기 위해서도 그는 평소 한발 비켜선 능청으로 숨을 골랐을 가능성이 높다. 작가는 이신(이신통)과 연옥이라는 주인공 못지않은 비중으로 등장하는 이 인물의 죽음을 누군가의 전언으로 짧게 처리하고 마는데, 아마도 그렇게 해야 했으리라. 그리기로 치자면,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난 숱한 민란, 임오군란, 갑오농민혁명의 세월이 담겨 있는 이 소설 안에만도 얼마나 많은 무명의 죽음이 있는가. 그리고 그 죽음들에 애 닳았을 가족들의 신산한 삶이 있겠는가. 문학의 언어는 그 죽음과 삶들을 감당할 수 없다.
서얼로 태어나 소설 읽어주는 전기수(傳奇叟)로 떠돌다 서일수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신의 변변치 않은 인생을 밀어넣은 이가 <여울물 소리>의 주인공 이신이라는 인물이다. 동학 세력이 붕괴된 후에 그는 활빈당의 지역 책임자가 되어 남은 뜻을 펼치다 영월 동강의 한 포구 마을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신을 기다리며 평생을 살아온 여인 연옥은 이장을 위해 포구를 찾고, 흰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유골을 수습한다. 그 밤, 이신이 마지막 두 해를 보낸 뗏사공의 방에 누워 여인은 여울물 소리를 듣는다. “여울물 소리는 속삭이고 이야기하며 울고 흐느끼다 또는 외치고 깔깔대고 자지러졌다가 다시 어디선가는 나직하게 노래하면서 흐르고 또 흘렀다.”
위안과 치유의 언어가 필요한 시절이다. 어느 면에서는 넘쳐난다 싶기도 하다. 그러나 당장 어떠한 보상도 기약할 길 없는 정인의 죽음 앞에서 한 여인네가 듣는 여울물 소리는 그저 자연의 심상한 사실로 거기 옆에 있을 뿐이다. 앞선 역사를 산 우리네 많은 무명씨들 역시 그렇게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을 것이다. 그 밤과 아침을 생각한다.
정홍수 강출판사 대표·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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