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섭 국제부 기자
공항에서 리무진 택시를 탄 미국 민주당 주요 인물에게 택시기사가 말한다.
“난 당신네들 안 찍었어요. 세금 오르는 게 싫거든요.”
민주당 인사는 대답한다. “당신 세금 올리는 게 아닙니다.”
택시기사는 다시 묻는다. “비닉(공화당 후보)은 세금을 내려준다고 했는데요?”
민주당 인사는 또 대답한다. “당신 세금 내리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태우고 다니는 손님들 세금 말하는 거죠.”
미국 정치드라마 <웨스트윙>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서민층이 ‘부자증세’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현실을 꼬집는다. 사실 자신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세금을 올린다면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세금을 줄이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학습된 믿음’ 때문이다. 감세와 규제 철폐의 시대였던 로널드 레이건 시기 경제가 살아나는 것을 지켜본 미국인들에게 이러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론의 전도사였던 시카고 학파는 이런 믿음을 전세계에 전파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이제 근간부터 무너지고 있다. 부자들의 세금을 줄여줘도 경제는 성장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수십년 쌓인 탓이다. 당장 미국부터 부자감세를 중단했다. 비록 ‘재정절벽’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 마지못해 처리하긴 했지만 공화당이 상위 1%에 대한 증세, 아니 감세혜택 중단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상징적이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일본 또한 간접세인 소비세 인상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줄이려는 목적이긴 하지만 부유층 소득세 최고세율을 현행 40%에서 45%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자민당 내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목소리가 높은 상황이다.
연 100만유로(14억원) 이상 소득자에게 최고 75%의 세금을 물리기로 한 프랑스의 부자증세안도 계속 추진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비록 위헌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는다는 발상 자체에 철퇴가 내려진 것은 아니다. 개인 과세냐 가구합산 과세냐라는 기술적 문제만 해결되면 다시 헌법재판소에 가더라도 문제없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재정위기에 빠진 그리스도 추가 세금 인상에 합의했다. 전반적으로 증세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줄고, 부자증세를 지지하는 국민이 많아졌기 때문에 반발도 그다지 거세지 않다.
아직도 부자들에게 감세 혜택을 주면 그들이 일자리를 만들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두 종류 중 하나다.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어리숙한 사람이거나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려는 부류다. 세금을 줄여 부자들의 소득을 늘려주면, 그 착한 부자들이 다시 일자리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번 재정절벽 협상 과정에서 공화당조차 그런 증거를 들이밀지 못했다. 감세가 일자리를 못 늘린 것이 아니라 경제위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고? 내 말이 그 말이다. 일자리는 경제가 좋으면 늘어나고 경제가 나쁘면 줄어든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물리고 덜 물려서 그런 게 아니다.
곧 출범할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은 ‘줄푸세’로 요약된다.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는 말이란다. 법질서는 빼더라도 ‘줄푸’는 현재 전세계 조류와 정면으로 역행한다. 이것저것 선심성 복지정책을 약속했던 박근혜 정부는 재원 부족분을 ‘지하경제 (활성화가 아니라) 양성화’에서 찾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가 지하경제 대국이라면 몰라도 이는 한참을 잘못 짚은 것이다. 이제 감세의 시대는 가고 증세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이 옛날 사람이라고 정책마저 거꾸로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형섭 국제부 기자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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