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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도둑 잡으랬더니 신고자를 처벌해? / 정재권

등록 2013-02-19 19:16수정 2013-02-19 22:28

정재권 논설위원
정재권 논설위원
내일(2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중요한 재판이 시작된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한겨레> 최성진 기자의 재판이다. 자사 기자를 위해 지면을 사유화했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겠지만, 이 사건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자유에 미칠 영향이 워낙 심대하기 때문이다.

최 기자가 법정에 서게 된 출발점은 한 차례의 전화통화다. 최 기자는 지난해 10월8일 오후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휴대전화 통화를 했다. 통화는 처음부터 녹음되고 있었다. 9분가량 통화한 뒤 마무리 인사를 나눴지만, 공교롭게도 최 이사장의 ‘실수’로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때 이진숙 <문화방송> 기획홍보본부장의 목소리가 들렸고, 정수장학회가 소유한 문화방송 지분의 매각 얘기가 흘러나왔다. 최 기자의 녹음은 ‘본능적으로’ 1시간가량 이어졌다.

그 녹음의 결과가 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정수장학회 비밀회동’이다. 최 이사장과 이 본부장은 18대 대선을 눈앞에 둔 시점에 공영방송인 문화방송의 지분을 매각하고, 거기서 생긴 돈으로 유권자(대학생)들에게 등록금을 주는 방안을 논의했다. 특정 대선후보에 대한 지원 논란을 낳을 수 있는 민감한 내용이다. 기자라면 누구든 눈이 번쩍 뜨일 ‘특종’감이다. 실제로 최 기자는 이 보도로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달의 기자상’과 전국언론노조의 민주언론상, 미디어공공성포럼의 ‘2012년 언론인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쓸었다.

그런데도 유독 검찰의 반응은 달랐다.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해 보도했다며 처벌의 칼을 꺼내들었다. 반대로 시민단체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최 이사장과 이 본부장에 대해선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도둑을 잡으랬더니 엉뚱하게 신고자를 처벌하겠다고 나선 꼴이다.

검찰의 기소는 황당하다. 우선 최 기자가 최 이사장과 이 본부장의 대화를 녹음한 것은 고의성이 전혀 없다. 두 사람이 만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우연히 휴대전화로 대화 내용을 들었을 뿐이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방안의 대화가 들린 것과 흡사하다. 불법의 경계선 바깥에서 정보를 얻었다고 보는 게 상식에 부합한다.

백번을 양보해 불법의 여지를 찾자고 해도 명백하게 ‘위법성 조각 사유’(형식상 범죄 행위의 요건은 갖추었으나 위법하다고 보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 정수장학회 문제가 대선의 주요 쟁점이었던 만큼, 대화 내용 공개로 얻어진 국민의 알권리는 최 이사장 등이 침해당한 사생활의 비밀보다 가치가 월등히 크다. ‘공익’이 ‘사익’을 앞서는 것이다. 이 회동 내용이 정치·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고, 모든 언론이 주요 이슈로 다룬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최 기자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국민의 알권리를 처벌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가 연출한 언론자유 억압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정부가 지난 5년 동안 퇴보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언론자유는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힐 만하다. 국제 언론감시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RSF)가 발표한 ‘2013 언론자유 지수’에서 한국이 179개 조사대상 국가 가운데 50위를 차지한 것이 분명한 방증이다. 한국은 2012년 44위였으나 한 해 만에 여섯 단계나 떨어졌다.

흔히 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기초라 불린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이미 200년도 전에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말했던 이유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선 ‘신문 없는 정부’를 원하는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참담하다.

정재권 논설위원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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