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슬로바키아가 분리된 지 20년이 됐다. ‘이혼’은 폭력이나 투표절차 없이 이뤄졌다. 두 지도자-체코의 바츨라프 클라우스와 슬로바키아의 블라디미르 메치아르-는 분리하는 게 최선이라고 결정했다. 대다수 이혼자들처럼 ‘아이들’과는 상의하지 않았다.
2013년 두 나라를 여행하면서 나는 1989년 ‘벨벳 혁명’ 이후 여러 해 만에 이뤄진 이 ‘벨벳 이혼’에 관해 다소 다른 관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행 기차에서 만난 한 여성은 자신의 출생국이 해체된 데 대해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체코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체코, 아버지는 슬로바키아 태생이었다. 나라의 분리는 가족을 분리시켰다. 당시 그들은 체코로 이주하기를 원했으나 외국인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가 1993년의 분리에 대해 묻자 그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체코가 기본적으로 슬로바키아를 갈취했다는 것이다. 그는 슬로바키아의 그 누구도 벨벳 이혼에 대해 재고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말로 슬로바키아에 머무는 동안 그 결정을 재론하고 싶어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체코는 프라하의 국제적 명성 덕분에 여행자가 거의 8배나 많지만, 브라티슬라바는 주요 공항조차 없어 인근 빈에 의존한다. 벨벳 혁명을 얘기할 때면 프라하나 바츨라프 하벨이 언급된다. 슬로바키아의 기여는 무시되기 일쑤다. 그러나 슬로바키아는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독립국가다. 슬로바키아인들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다른 한편, 체코에서 나는 공유된 과거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저명한 과거 반체제 인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그리워한다”고 말했다. 다른 과거 반체제 인사는 “그것은 더 큰 나라에 대한 향수일 뿐”이라고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다른 어떤 것을 발견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특별한 것을 의미했다. 1920~30년대 다른 나라들이 광신으로 표류할 때,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인 토마시 마사리크 치하의 새 나라는 민주적 제도를 유지했다. 그 나라는 나치에 저항했고, 1968년에는 소련에 저항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한 나라 이상이었다. 그것은 상징이었다. 1993년의 여론조사에서 체코인들의 대다수가 그 나라가 쪼개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고, 그런 감정의 일부는 명백히 남아 있다.
오늘날, 이혼의 두 설계자는 자신들의 정치 경력이 빛을 잃어가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클라우스는 사면권을 남용했다가 상원에서 탄핵을 당하고 이달 초 불명예 퇴진을 했다. 메치아르는 슬로바키아를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국가로 이끌고 갔다가 시민들의 퇴위운동을 촉발했다. 시민들은 1998년 목적을 성취했다. 메치아르는 이제 잊힌 인물이 됐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현재 그 어떤 이웃 나라들보다 부러움을 받는 관계를 만끽하고 있다. 총리들은 원만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 두 나라는 공동 인프라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작전에 연합 군부대를 참여시킨다. 두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많은 결혼이 이뤄지고, 공유된 문화가 존재한다.
벨벳 이혼은 역사상 가장 민주적으로 조직된 이벤트는 아닐지 모른다.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긴 지도자들의 정치 경력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리고 양쪽이 그 결과를 매우 다르게 보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는 이제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용감한 저항과 분별있는 갈등 해결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그 자손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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