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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 에서] 아버지의 지슬 / 김영희

등록 2013-04-03 19:14

김영희 문화부장
김영희 문화부장
어린 시절 친할머니 집에 대한 기억은 5~6분만 걸으면 닿는 바닷가에서 즐기던 대나무 낚시, 그리고 볼일을 볼 때 ‘꾸웩’ 하며 부르르 아래에서 떨던 돼지의 요란한 소리 정도다. 서울에서 자라난 내게 아버지의 고향 제주도는 몇 년에 한번 비행기를 타고 가 며칠간 머물다 오는 낯선 곳이었다. 제주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바닷가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친척이라며 반기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에 무조건 “네~네~”만 했던 것 같다.

집집마다 인사를 다니며 어린 마음에 좀 이상한 것은 그 마을엔 아내가 여럿인 사람이 적잖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전복 따는 물질부터 밭일까지 일은 여자들이 다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주도 사람은 원래 여자가 세다”는데 아내는 여럿? 쩝. 친할아버지가 4·3 때 경찰의 총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어릴 적 얼핏 들었지만, 아무도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 빨갱이들 때문이지”라고 말하셨다.

성인이 된 이후 늘 아버지를 ‘보수적인 강남 중산층의 전형’이라 생각했다. 중소기업 임원으로 정년퇴직한 아버지는 87년 민주화항쟁 때는 나라가 무너질까 우려하셨고, 대학 간 자식이 운동권에 관여할까 전전긍긍하셨고, 속만 썩이다 결국 ‘이상한’ 신문사에 들어간 딸의 앞날을 내내 걱정하셨다. 크고 작은 선거에서 아버지와 딸은 같은 사람을 찍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사회문제를 두고 얘기하면 결국 큰 소리로 귀결돼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할아버지에 대해 묻지 않았던 것도, 4·3을 이야기하다 보면 싸움만 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버지 앞에서 이야기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얼마 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영화 <지슬>이 계기였다. 평소 영화 보기를 즐기지 않고, 제주도민회에서 주최한 시사회마저 몸이 불편하다며 가지 않았다던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극장에 다녀오셨다. ‘아버지가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는 딸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을 것이다.

1948년 당시 제주도에 내려진 소개령은 ‘해안가 5㎞’ 밖인 지역이 대상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아버지 고향처럼 지서가 없는 바닷가 마을도 해당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아버지는 소개령이 떨어지자 곧장 이웃 큰 마을 지인의 집으로 피난 보내졌다. 병이 있었던 할아버지는 남았다. 아버지가 들은 것은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총에 맞았다”는 것이었다. 마을 남자들은 한 곳에 불려나가 총을 맞았다.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이 작은 마을에 아내가 많은 남성들이 생긴 것은 그 이후라 한다. 불에 다 타버린 마을에 돌아온 아버지는 1년 늦게 중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이제까진 병으로 일찍 죽은 줄로만 알았던 셋째 고모에 대해서도 “빨치산에 끌려갔는지 스스로 간 건지 모르겠다”고 처음으로 말하셨다. 마치 들려줄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육지에 건너온 이후 삶까지 이야기를 잇는 아버지에게선 내가 기억하던 그 완고하고 무서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왜 그동안 아버지에게 묻지 않았을까. 체험한 사실마저 좌우 이념으로 재단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면서 말이다. 아버지가 움켜쥔 ‘안정을 지켜준다’는 보수 반공 이데올로기 또한 4·3을 겪고 힘겹게 자리잡은 당신 생애의 버팀목일 수도 있었을 텐데. 아버지 같은 이들의 가슴속 이야기를 들어보려 하지 않고, 단지 그들을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답답한 존재’라고만 여겨온 건 아닐까. 지금도 아버지와 생각의 차이는 크지만, 영화 한 편이 부녀 사이 오래된 벽 한 귀퉁이를 조금 허물었다.

김영희 문화부장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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