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지난 14일, 한국 중산층 가구의 55%가 주택구입 대출금과 자녀 사교육비로 적자 인생을 살고 있다는 한 컨설팅회사의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대기업 임원이 암에 걸렸는데 자녀 유학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지 못한다는 말을 전해 듣거나 고액 연봉을 받는 조카사위가 거액의 아파트 대출금과 갓 태어난 아들 유학비 걱정에 잠을 잘 못 자고 상사와 술 마시는 빈도가 늘어났다는 조카의 불만을 듣노라면, 실제로는 한국 중산층의 55%가 아닌 99%가 지속 불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조사를 수행한 매킨지 연구진은 담보대출 방식이나 고등교육에 대한 인식,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 활성화 등과 관련된 제안을 해법으로 내놓긴 했지만, 사실상 이 난감한 문제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독점의 원리와 화폐 중심성을 넘어서야 풀릴 문제다. 적자 인생으로 돌아가도록 구조화된 거대한 롤러코스터 체제를 넘어설 탁월한 혜안이 필요하며, 삶의 전면적 구조조정을 다루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정말 돈이 없어 문제인가? 살펴보면 지금 우리 주변에는 돈이 너무 많아 탈이고 남아도는 집과 공간도 적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은 나눔의 지혜, 살아가는 힘을 주는 우애의 관계가 아닌가? 삶과 경제를 풍성하게 만드는 호혜성과 창의성 같은 비물질적 자원이 순환되는 영역이 사라진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일터와 가정 영역 중간에 친지들이 어우러지는 제3의 공간이 있었고, 학교와 학원 사이 아이들이 즉흥적으로 어울릴 놀이터가 있었고, 지불 노동과 생애에 걸쳐 하는 일 사이에 다양한 경험과 활동이 펼쳐지는 또 다른 활동공간이 있었다. 경제와 삶의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려면 바로 이 제3의 영역, 눈으로 볼 수 없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를 생산해내는 삶의 장을 회복해야 한다.
‘동네 나눔 부엌’이라는 장소를 상상해보자. 동네마다 주민자치회관이나 동사무소가 있고 그곳에 직원 식당이 있다. 점심시간에만 사용하는 그 공공공간을 주민들에게 개방한다고 생각해보자. 독점이 아닌 공유의 원리를 삶 속에서 뿌리내려 보자는 것이다. 여유가 생긴 주부들과 요리에 취미가 있는 프리랜서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동네 부엌에서 국을 끓인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동네에 사는 대학생들이 가장 환영할 일일 것이다. 4년 내내 공짜로 밥과 술을 얻어먹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돈이 없어서, 또는 바빠서 밥을 대충 때우거나 아예 못 먹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모두가 ‘집밥’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대학가에는 ‘함께 밥 먹자’는 동아리까지 생겨났다. 반찬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동네 부엌은 더욱 붐비지 않을까? 국을 제대로 끓일 줄 모르는 나도 배달 온 꾸러미 채소를 가지고 회식이 없는 날이면 그곳에서 밥을 얻어먹고 부지런히 설거지를 할 것이고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 못하는 젖먹이 아기 엄마가 오면 엄마의 식사시간 동안 아기를 돌볼 것이다. 방과후에 마을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나 딱히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 동네 부엌에서 밥을 먹고 정이 가는 동네 형과 언니들에게 숙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까?
냉장고에 가득 쌓인 식자재만 보면 골머리가 아프다는 골드미스는 유통기간이 끝나기 전에 식재료를 가져다줄 곳이 생겨 행복해질 것이고 옥상 텃밭에 남아도는 파와 상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아저씨도 기꺼이 단골이 될 것이다. 동사무소 직원과 동장님, 구청장도 시장님도 가끔 국을 끓이고 나누면서 민심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자주 만나는 아이의 멘토가 되어 삶이 풍성해진 동네 어른들도 생길 것이다. 동네 아티스트가 식당을 따뜻한 분위기로 만들어줄 것이고, 이런저런 마실로 마을은 안전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을에 필요한 일거리도 생기고 협동조합도 생기고 골목 카페도 생겨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고부가가치 산업 아닌가? 이웃과 함께하는 밥상 공동체로 지속가능한 삶의 시대를 열어가 보자. 오늘 저녁 가까운 주민자치회관으로 슬슬 산보를 나가 보실까?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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