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무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오늘 워싱턴에서 재벌 총수들과 취임 뒤 첫 만남을 갖는다. 영어의 몸이 된 총수 빼고 이건희 삼성, 정몽구 현대, 구본무 엘지 회장 등 주요 그룹 회장들이 빠짐없이 참석하는 자리다. 이 회장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날아가는 성의를 보였다. 북한 리스크로 야기된 한국 경제에 대한 우려를 떨치기 위해 재계 인사들이 대거 동행했다고 전경련은 설명했다. 재계는 투자 보따리를 준비해 갔다고 한다. 새 정부에 보내는 구애라는 사실을 모를 바 없다.
박근혜 정부는 재벌에 채찍과 당근을 병행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대기업의 잘못된 관행은 반드시 바로잡겠다는 경제민주화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기업을 옥좨서는 안 된다고 여지를 남겼다. 그러다 보니 정부 안에서도 한편에선 경제민주화 입법을 추진하고 다른 한편에선 투자 활성화와 규제 완화의 군불을 지피고 있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거에서 경제민주화 속도조절론이 쟁점이 되고 있는 상황도 이러한 양 날개 기류를 반영한다. 따라서 재계는 박 대통령이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파티장의 테이블 아래에서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재벌과 생래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재벌은 박정희 대통령이 내세운 경제발전 전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유산인 재벌은 한강의 기적과 함께 재벌공화국이라는 뚜렷한 공과의 족적을 남겼다. 유망한 산업과 유망한 기업을 골라 지원하는 선택과 집중이 박정희 정부의 경제발전 전략이었다. 간택받은 기업들은 정부가 과열경쟁을 막기 위해 진입장벽을 쳐준 덕분에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사업을 할 수 있었다. 자금을 배분할 때도 정부는 특정 기업에 몰아서 혜택을 주었다. 은행 융자도 중요했지만 차관을 배분받은 기업은 앉아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정부는 수출기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반대로 노동조합은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기업 소유주와 임직원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공은 그들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정부가 제공한 커다란 특혜가 있었다. 그 특혜는 선택받지 못한 다른 기업이나 소비자, 노동자들의 커다란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집안으로 치면 동생들의 희생 위에 소 팔고 논 팔아서 대학 보낸 가난한 집 맏아들이다. 숙명여대 유진수 교수는 <가난한 집 맏아들>에서 재벌을 그렇게 비유한다. 다행히 맏이가 성공했으면 연로한 부모와 힘없는 동생들을 돌보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라며 최소한의 빚 갚을 생각은 않고 가난한 동생들 재산마저 털어먹으려는 맏이가 있다면? 마구잡이로 영역을 확장하고 부당 내부거래를 일삼는 재벌이 그런 격이다. 삼성 엑스파일이나 한화 주먹다짐 사건은 심지어 재벌 총수들이 무소불위로 법 위에서 놀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사회문제로 불거진 갑의 횡포 또한 전근대적인 재벌문화의 소산이다.
부녀로 이어지는 인연과 그에 따른 재벌들의 부채의식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재벌에 대한 감시자, 교정자로서의 책무와 함께 권능을 부여한다. 지난 선거 때 경제민주화를 가장 잘할 후보로 그가 꼽힌 것도 이러한 원천적 카리스마가 있기 때문이다. 전가의 보도가 손에 쥐어진 것이다.
박 대통령과 재계의 만남은 재벌의 인식과 행동에 변화를 가져오는 변곡점이 돼야 한다. 재벌 총수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로 법치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 경제민주화 입법이 추진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속 시원한 결자해지를 기대한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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