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안나 카레니나 법칙’과 대북정책 / 오태규

등록 2013-05-09 19:04

오태규 논설위원
오태규 논설위원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르다.” 레프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선 사랑, 돈, 종교, 자녀 등 여러 요소가 다 들어맞아야 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라도 어긋날 경우 불행해진다는 걸 표현한 말이다. 실제, 소설의 두 축을 이루는 ‘브론스키-안나’와 ‘레빈-키티’ 두 쌍이 연출하는 불행과 행복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왜 이 구절을 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 크게 유명세를 타게 된 데는 <총, 균, 쇠> 저자인 진화생물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교수의 덕이 크다. 그는 이 책에서 ‘행복은 모든 조건이 충족돼야 이뤄진다’는 톨스토이의 행복관을 ‘야생동물의 가축화’ 과정에 적용해 설명하면서 ‘안나 카레니나 법칙’을 만들어냈다. 야생동물 중 초식성이고, 성장 속도가 빠르고, 감금 상태에서 번식할 수 있고, 난폭하지 않고, 예민하지 않으며, 사회성이 강하다는 여섯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종만이 가축화에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계기로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일약 자연뿐 아니라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법칙으로 재탄생했다.

대북정책의 성공 여부도 이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 지난 20년간 우리나라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 핵 저지를 위해 강경책도 구사하고, 유화책도 써봤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제3차 핵실험에서 드러났듯이 어느 정책도 제대로 효험을 거두지 못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포용정책은 주체성과 창의성은 있었으나 국내 보수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의 정책은 애초부터 대책 없는 강경책에 불과했다. 안나 카레니나 법칙으로 설명하자면, 어느 정책도 결과적으로 성공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무엇이 성공의 조건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가 성공하려면, 우선 성공의 조건부터 추출하는 게 필요하다. 그런 뒤에 그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펼쳐야 한다. 그럼에도 대북정책의 성공은 매우 난해한 방정식을 푸는 작업이 될 것이다. 야생동물의 가축화 변수는 6가지로 고정되어 있기라도 하지만, 대북정책의 성공 조건은 그렇지 않다. 가짓수도 만만치 않지만 상황에 따라 변수의 변화가 매우 크다. 그래서 어느 정책보다도 창의성과 끈기가 요구된다.

대북정책은 크게 3가지 요소, 즉 우리나라 내부, 북한, 국제사회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해야 성공할 수 있다. 또한 세 요소는 각 분야에서 여러 갈래로 나뉜다. 우리 내부만 봐도 여와 야, 노와 소, 진보와 보수가 서로 생각과 접근법이 다르다. 국제사회도 미국과 중국의 차이가 있고, 일본과 러시아가 같지 않다. 북한도 군부와 당의 생각, 집권층과 주민의 요구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대북정책의 안나 카레니나 법칙은 그 어느 것보다 복잡하고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복잡한 대북정책 방정식을 풀기 위해선 우리 내부, 북한, 세계라는 세 가지 주요 변수를 동시에 고려하면서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조건부터 채워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게 우리 안에서 초당파 협력과 합의를 이루는 일이다. 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정책 합의도 성공적 대북정책을 위한 여러 조건 중 중요한 한 요소일 뿐이다. 그런데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보니, 박 대통령이 이런 큰 그림의 윤곽이나 제대로 잡고 있는지 걱정이 앞선다.

오태규 논설위원 트위터·페이스북 @ohtak5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