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원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국제정치
아베 신조 정권이 또다시 무너진다면 역사인식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 최근 일본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자주 들리는 걱정이라고 한다. 시류에 편승해서 돌출 발언을 하기 쉬운 소장 의원들에게 ‘말조심’ 지시가 내렸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정권의 최고 책임자인 아베 총리 자신이 ‘자학사관’(自虐史觀)을 수정한다는 사명감을 숨기지 않는 상황이라 통제도 여의치 않은 것 같다. 12일에는 자민당 지도부에 속하는 다카이치 사나에 정책조사회장이 공영방송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를 다시금 비판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그 이틀 전 관방장관이 “무라야마 담화를 전체적으로 계승한다”고 모호하게나마 논란을 봉합하려고 시도한 직후의 일이다.
아베 정권의 움직임을 보면 일종의 기시감을 금할 수 없다. 2006년 9월에 취임한 아베 총리는 애초 예상과는 달리 자신의 우파적 신념을 억제하고 중-일 관계 개선에 진력했다. 그런 현실주의적 태도와 더불어 정치가 아베에 대한 평가도 높아지고 지지율도 상승했다. 이에 자신감을 가졌는지 2007년 봄부터 “종군위안부에 강제성이 없었다”는 주장을 비롯해 우파적 역사인식의 정책화를 공개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고노 담화 수정, 헌법 개정 등 이념적 쟁점이 돌출되면서 여론도 서서히 분열되고 지지는 식어갔다. 정권 내부의 실언이 겹치면서 역사인식과 위안부 강제성 부인은 미국 의회와 여론으로부터도 비판받아 아베 총리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상황도 점점 닮은꼴이 되어간다. 제2차 정권 출범 당시에는 지난번 경험의 반성을 토대로 해 단계적 추진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아베노믹스’를 내걸고 경제 살리기에 주력해 7월 참의원 선거에 승리해 장기 정권 기반을 굳힌 이후에 평화헌법 개정과 역사인식 수정을 하나씩 실현해 간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70%를 웃도는 지지율을 배경으로 삼아 신중한 자세는 사라지고 또다시 이념적 쟁점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4월21일 아소 다로 부총리 등 각료 의원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23일 아베 총리의 ‘침략 부정’ 발언 이후 역사인식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아베 정권 안에도 쟁점화를 피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개헌 문제와도 맞물리면서 참의원 선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예상보다 빠른 아베 정권의 우경화 행보의 배경을 놓고는 지지 기반인 보수층 결집, 선거 이후 본격적 우경화 추진을 위한 포석, 한국과 중국의 외교적 압력에 대한 반발 등 다양한 분석이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적 계산보다는 아베 총리 자신의 우파적 신념이 드러난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높은 지지율을 배경으로 한 고양감이 정치적 균형과 외교적 배려를 밀어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공행진을 하는 지지율은 기본적으로 경제 살리기에 대한 기대가 배경에 있다. 극약처방인 아베노믹스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며 경기회복 효과가 가시화하기 전에 물가상승으로 생계를 압박하는 부작용이 먼저 나타날 위험성도 지적된다. 영토분쟁과 역사문제를 둘러싼 아시아 역내 불안정은 일본 경제에도 부담으로 되돌아온다. 경제회복이 더디어지면 아베 정권에 대한 지지는 일시에 거품이 빠질 수도 있다. 평화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대 의견이 절반을 넘는다. 우경화 행보는 자신의 이익에도 반한다는 인식을 일본 사회에 다시금 촉구하는 폭넓은 노력이 국제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이종원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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