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몇 해 전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여자 후배가 딸 돌을 맞았다. 옷을 사주려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다 ‘노란색’을 골랐다. 분홍색도 파란색도 아닌, ‘젠더 중립적’인 선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후배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자들 대부분이 노란색 옷을 사왔다고.
그로부터 몇 해 지나 네살배기 남자 조카랑 백화점에 갔다. 장난감을 고르랬더니 이 녀석이 난데없이 ‘헬로키티’ 매장으로 달려가 분홍색 빗을 집어들었다. 당황스러웠다. 다른 걸 찾아보자고 이리저리 꾀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헬로키티 빗을 카드로 결제했다. 싱긋 웃는 남성 점원한테 “남자애들이 헬로키티를 사는 경우가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솔직히, 심사가 복잡해졌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엄마 드레스를 입고 황홀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는 빌리의 친구, 마이클이 떠올랐다.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 생존 투쟁이 벌어지던 탄광촌에서, 빌리는 ‘남자답지 못하게’ 발레리노를 꿈꿨고, 마이클은 ‘남자답지 못하게’ 남자를 사랑하는 소년이었다. 몇 달 뒤 조카는 내 파란색 접이식 빗과 헬로키티 빗의 교환을 수락했다. 고백하겠다. 그때에야 ‘안심’했다고.
파랑-분홍 양자 선택을 거부하고 노란색을 소비하면서, 정작 내 가족은 파란색이나 분홍색 어딘가에 속해 있기를 바라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최근 미국 <워싱턴 포스트>에 사회과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한 여교수가 ‘내 딸이 무도회에 여자 친구를 초대했을 때 난 왜 괴로웠나’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딸이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16살짜리 딸이 학교 파티에 파트너로 여자 친구를 데려가겠다고 하자 그 역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내 딸은 레즈비언이 아닌데 왜 남자와 함께 춤추지 않겠다는 거지? 난 딸 스스로의 선택을 중요하게 여긴다면서도 왜 신경이 쓰이는 거지?’ 그는 파티에서 돌아온 딸이 “내년엔 남자애랑 파티에 가겠다”고 하자 드디어 ‘안심’했다며 자신의 모순적 감정을 고백한다.
최근 몇 달 동안 미국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동성결혼 합법화가 이슈로 떠올랐다. 자신이 원하는 성 정체성을 선택하도록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일은 인권과 민주주의, 진보의 관점에서 지지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사도 그렇게 써왔다. 하지만 어느 날 내 가족이 커밍아웃한다면 어떠할까. 분홍-파랑 이분법을 넘어, 노란색을 넘어 ‘무지개’까지 스스럼없이 나아갈 수 있을까. 한국처럼 커밍아웃이 소수인 나라에선 이러한 커밍아웃을 접할 기회 역시 희귀하기에 머릿속으로 잠시 ‘가상훈련’을 해봤다.
지난 3월 미국 보수파의 대표 인물인 로버트 포트먼 공화당 상원의원이 동성결혼 합법화에 찬성한다고 밝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지난해 대선에서 밋 롬니와 짝을 이룰 부통령 후보로 거론된 정치인이, 아들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한 사실을 커밍아웃한 것이다. 아들 윌은 자신이 다니는 대학 신문에 “부통령 후보 검증 절차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는 롬니 캠프에 아들이 게이라고 밝혔고 후보가 된다면 선거운동 기간에 이를 공개하겠다고 알렸다. 결국 후보 낙점을 받지 못했는데 나는 내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아 너무 다행스럽게 생각했었다”고 썼다.
올가을 영화감독 김조광수씨가 동성 애인과 화촉을 밝힌다. 그는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씨 등에게 청첩장을 보내겠다고 공언했다. 박 대통령은 잘 모르겠고, 나머지 사람들은 갈지 말지, 참모들이 고민한단 얘기는 살짝 전해들었다. ‘커밍아웃을 훈련할 기회’, 놓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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