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이명박 정부가 파탄시킨 남북관계가 박근혜 정부에서 이어지고 있다. 정전협정 60주년인데도 한반도 위기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시진핑 회담을 앞두고 있지만 모양새가 우습다. 북은 도와 달라고 애걸하고 남은 도와주지 말라고 복걸하는 형국이다. 민족의 자존심이 이토록 망가진 적이 있었던가.
박근혜 대통령은 ‘신뢰 프로세스’를 금과옥조로 떠받든다. 이명박 정부가 5년 내내 ‘비핵4000’을 내걸다가 쪽박을 찬 것과 비교된다. 모처럼 시도된 남북대화를 ‘격’을 이유로 들어 깬 것은 남북 지도자들의 수준을 보여준다.
남북 지도자는 정전협정도, 외국군 주둔도, 과도한 군사비도, 구걸외교의 비굴함도, 이산가족의 아픔도, 개성공단 폐쇄와 금강산관광 중단도 안중에 없어 보인다. 양쪽의 극우·극좌 세력에 둘러싸인 지도자들은 민초들의 아픔, 겨레의 내일이 보이지 않는가.
박 대통령은 ‘신뢰 프로세스’란 대북전략보다 상위인 헌법을 읽어보길 바란다. 헌법 전문은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하고”라고 하여 ‘평화적 통일’과 ‘동포애’, ‘민족의 단결’을 명시한다. 또 헌법 66조 3항은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라 하고, 69조는 취임 때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을 국민 앞에 선서하도록 했다. 국회의원들도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며”를 선서한다.
헌법과 국회법에서 ‘평화적 통일의 사명’을 명시한 것은 권력자나 국회가 냉전논리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6월 항쟁으로 쟁취한 국민적 합의다. 노태우 정부의 전향적인 대북조처도 이에 따른 것이었다.
제대로 된 야당이 있었다면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를 파탄내고 ‘민주개혁’은커녕 총리실의 민간인 도청, 국정원의 선거개입 등 민주 역행에 위헌의 탄핵소추를 제기했을 것이다.
6·15 선언은 유엔이 지지했고, 10·4 선언은 국민 80%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 헌법의 대통령 의무 조항에는 ‘업무의 계승’의 규정이 있다. 전임 정부의 정책이라 해서 이를 쉽게 파기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이다. 독일은 사민당과 기민당이 정권을 교체하면서도 통일정책만은 이어받아 통일을 이루었다.
요즘 여당과 국정원이 편집된 남북정상회담 발췌록(북방한계선 발언)을 공개한 것은 정략성과는 상관없이 집권당과 정보기관의 한심한 수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향후 남북대화와 각국과의 정상회담 등에 미칠 파장은 상상하기 어렵다.
박정희는 독재정권을 계속하면서 ‘선경제 후통일론’을 제시했다. 일정 부문 타당성이 없지 않았다. 서독의 예도 있다. 국민의 피땀으로 ‘선경제’는 어느 정도 이루었다. 한국 군사비가 북한의 국가총생산비(GDP)와 맞먹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후통일론’은 실종되고, 그때의 유산대로 걸핏하면 좌경 용공 종북타령이다. 북한의 존재가 없으면 한 달도 버티기 어려운 것이 남한의 우파권력이라면, 그래서 화해협력이 거부되고, 천문학적인 예산으로 첨단무기를 사들이고, 북은 핵개발로 대처한다면, 이 땅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일본은 북한을 빌미로 삼아 역사왜곡과 군사대국화를 추진하고, 미국은 중국의 봉쇄를 위해 한국을 대중국 전진기지화를 서두르고, 북한의 천연자원은 중국으로 넘어가고, 남북 지도자들은 중국에 매달리는, 탈냉전과 냉전질서가 공존하는 한반도의 이중성을 타개하는 지도력은 없는 것인가. 박 대통령에게 이것을 바라기는 호랑이에게 육식 대신 초식을 기대하기보다 불가능한 일일까. 그것이 안 된다면 현대사의 모진 시련과 질곡을 견디면서 이를 극복해온 민중의 바른 역사인식과 새 시대를 여는 동력에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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