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논설위원
지금 한반도 상공엔 카키색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 진원지는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남재준 국정원장이다.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남북 실무접촉 결렬부터 수석대표의 격 문제로 파탄 난 남북 장관급회담, 북방한계선 포기 논란과 관련한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국방개혁 의제의 실종,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재연기 요청에 이르기까지, 최근 박근혜 정부가 내놓고 있는 주요 외교안보 정책마다 남 원장의 입김이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문제는 이런 결정이 외교안보팀의 민주적 토론이 아니라 그의 독단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히 ‘외교안보 정책의 남재준 독무대화’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먼저, 남 원장은 가장 핵심적 주권인 전작권의 환수 시기를 재연기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가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를 해 2015년 12월 환수라는 기존 입장을 번복하도록 설득했다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결정이 미국 쪽의 실수로 물 위로 드러나기 전까지 그를 제외하곤 외교안보팀의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전작권 환수 재연기를 주장한 바가 없었다. 심지어 박 대통령조차 5월 한-미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한-미 연합방위력을 강화·유지하는 방향으로 준비, 이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이제 와서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발언과 재연기 요구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국어 실력 부족이거나 혹세무민성 궤변 중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남 원장은 박 정부 들어 남북대화의 첫 시금석이었던 장관급회담 실무협상 때도 ‘통일부 장관의 상대로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전부장이 나와야 한다’는 논리를 제공하며 격 논란을 주도했다고 한다. 또 개성공단 실무회담에서 1, 2차 수석대표가 개성공단 외에 금강산 관광 재개 등에 대해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회담 도중 수석대표를 교체하도록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차부터 나선 새 대표는 북쪽 대표와 첫 대면에서 악수조차 하지 않았고, 회담은 결렬로 끝났다.
남 원장이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을 포기한 것’이라는 국정원 대변인 성명을 내도록 한 ‘역사적 행동’이 얼마나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는가는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바와 같다. 국정원은 남북 및 국제관계에 큰 파장을 불러올 게 뻔한 행동을 하면서도 주무 부서인 통일부나 외교부와는 전혀 상의조차 하지 않았다. ‘남재준의 위험한 폭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보를 수집·분석·평가하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정보기관이 정책 수립·집행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건 문명국의 관례다. 그러지 않으면 정보기관의 전횡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국정원은 마치 ‘국가정보원’이 아니라 ‘국가정무원’인 것처럼 행동한다. 여기에 총검술 정신으로 무장한 원장의 독주로, 국정의 문민통제라는 민주국가의 원칙마저 무너지고 있다. 남 국정원장(육사 25기)-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27기)-김관진 국방장관(˝ 28기)의 육사 팀과 윤병세 외교장관-류길재 통일장관-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의 문민 팀이 짝을 이룬 외교안보팀의 축은 이미 군인, 그것도 남 원장 개인 쪽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서열 중심의 군사문화가 위험한 건 합리적 토론과 판단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정보기관의 정치 관여와 군사문화의 지배라는 이중의 금기를 범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이런 점을 모르고 남 원장에게 힘을 실어준대도 문제지만 알고도 그런다면 더욱 큰 문제다.
오태규 논설위원 페이스북 @ohta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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