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영국의 국왕 헨리 2세는 1162년 공석이 된 캔터베리 대주교에 자신의 친구 토머스 베켓을 추천하였다. 왕자 시절부터 자신과 함께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던 친구를 대주교의 자리에 앉혀두어 교회의 온갖 간섭과 시비에 방패막이로 삼을 속셈이었다. 베켓은 이 불행한 계책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지만, 왕의 뜻은 강력했다. 그가 대주교의 자리를 수락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다른 결심도 했다. 그는 ‘정말로’ 대주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제 왕의 술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교회를 대변하고 왕권으로부터 교회의 권위를 지켰다. 왕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는 1170년이 저물어가던 어느 날 네 명의 기사를 대성당으로 보냈으며, 이 자객들은 기도하고 있는 베켓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토머스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은 이 살인사건을 다룬 연극이다. 젊은 날 나는 이 시극을 아마도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 읽었을 것이다. 그때나 이때나 기독교인도 가톨릭교인도 아닌 나에게 이 순교의 이야기는 큰 감명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베켓이라는 극중의 인물에게서 생생한 개성 같은 것을 느끼기도 어려웠다. 좀 고집이 있다는 것만으로 거대한 갈등의 한 축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이가 더 들었을 때, 아마도 불혹의 나이쯤에서, 이 연극을 한 성자의 순교 이야기로만 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제목 그대로 살인의 전말기로, 그것도 대성당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전말기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살해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고, 끔찍한 일을 벌여서는 안 되는 장소가 있다. 황무지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이 금기를 위반한 세계의 실상이다. 그 세계는 기억도 역사도 없기 때문에 황무지다. 거기에서는 산야에 있는 짐승의 이력이나 마찬가지로 인간 개개인의 이력이 모두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모든 장소가 같은 장소가 되어버린다. 엘리엇은 그 세계를 두려워했다.
내가 이 두 개의 해석(실은 해석이랄 것도 없지만)을 나름대로 종합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이가 들어서였다. 베켓이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 것이다. 베켓은 교회를 지키려 했으며, 교회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키려 했지만, 그 하느님이 반드시 기독교인들의 하느님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나 같은 불신자들에게라면 그것을 ‘빈자리의 권능’이라고 말하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이때 빈자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대성당의 살인>에 대해 내가 늘그막에야 가질 수 있었던 의견이다.
인간은 저마다 제 시대의 한계 안에서 산다. 우리 시대의 최고 지성이 평생을 연구해서 아는 것을 반세기 후의 초등학생은 교과서만 들춰보고도 안다. 우리 시대의 첨단 지식이 미래에는 상식에 속한다. 이 시대의 어떤 현명한 권력도 저 미래의 빈자리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면 폭력에 불과하고 죄악에 불과하다. 그래서 제 한계를 아는 모든 문명은 저 빈자리를 위한 제도를 만들어 지니고 있다. 종교가 그것이고, 예술이 그것이며, 가장 실천적인 제도로는 언론이 있다.
언론을 말할 때는 늘 따라다니는 말이 있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말도 있고,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도 있다. 그것은 왕관을 쓴 왕이 자기 권력의 한계를 의식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칼이 제 시대의 권력뿐만 아니라, 그 한계의 안팎을 연결하는 다른 권력에도 봉사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지금 한국일보 사주는 법원의 결정을 기이한 행태로 비웃으며 이 시대의 권위마저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그는 한국일보의 절대다수 기자들이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한국일보 기자들이 그 힘든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대성당을 피로 물들일 수 없기 때문이며, 이 세상이 황무지로 변하는 것을 눈 뜨고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똑같은 심정으로 그들을 지지한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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