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무 논설위원
전군표 전 국세청장이 씨제이그룹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1일 검찰에 불려갔다. 그로서는 세번째고 19명의 역대 국세청장 가운데는 8번째 검찰 소환이다. 2006년 7월 그가 국세청장에 내정됐을 때, 당시 법인세납세국장이었던 허병익 전 국세청 차장은 대학 동기인 씨제이 신동기 부사장으로부터 30만달러를 받아 간다. 청장 취임 축하 명목으로 돈을 받아 전했다는 게 허 전 차장의 주장이다. 이제 와서 전직 국세청 고위 간부 두 사람은 30만달러의 행방을 놓고 생존게임을 벌이고 있다. 얼마 뒤 전 청장이 정식 취임하자 전 청장과 허 차장, 이재현 씨제이 회장과 신 부사장 등 네 사람이 만난 자리에서는 수천만원짜리 명품 시계가 건네졌다.
국세청은 당시 이재현 회장의 주식 이동을 살피다가 3560억원에 이르는 탈세 정황을 포착했는데도 세금을 한 푼도 물리지 않았다. 씨제이 쪽의 조직적인 로비가 먹혔을 가능성이 크다. 씨제이 전 재무팀장이 이 회장에게 보낸 편지글에는 ‘업무상 금융정보분석원이나 금감원 공정위의 핵심 조직들에 대한 네트워크가 필수적이며, 국세청 또한 두말할 나위 없었으나 참으로 다행히 (신 부사장의) 대학 동기 분이 본청 국장급으로 있었다’고 쓰여 있다.
하마터면 묻힐 뻔한 씨제이 비자금과 탈세 의혹 사건은 공직 비리가 개인의 일탈이나 탐욕에 그치지 않고 엄청난 사회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고로 들어올 수천억원을 도둑맞은 격이다. 그로부터 2년 뒤 검찰과 경찰의 세무조사와 고발 요청을 받고도 국세청은 씨제이 쪽에서 자진 납부한 1700억원을 받는 선에서 이 회장에 대한 고발 없이 사안을 마무리했다.
김영란법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로 넘어갔다. 2011년 6월 국무회의에서 당시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이 보고한 법안이 2년여의 논란 끝에 애초보다 후퇴한 내용으로 첫 관문을 넘은 것이다. 공직 비리가 터질 때마다 분노하고 솜방망이 처벌에 허탈해했던 국민들이 김영란법에 거는 기대는 뜨겁다.
김영란법 원안은 대가성이나 직무 관련성을 따지지 말고 공직자가 100만원 이상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으면 형사처벌하자는 것이다. 국무회의를 통과한 수정안은 직무 관련성이 없는 경우엔 받은 돈의 2배 이상 5배 이하 과태료만 물리도록 했다. 과태료는 공무원 신분을 유지할 수 있고 전과 기록에도 남지 않는다니 빠져나갈 구멍을 내준 것이다.
공직 비리는 느닷없이 돈보따리를 안기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관리 모드’에서 비롯된다. 평소 밥 사고 술 사고 용돈 주며 스폰서 관계를 맺어오다가 일이 있을 때 청탁을 한다. 동그란 네모 같은 이른바 순수한 떡값, 대가성 없는 향응이라는 스폰서 관계가 크고 작은 공직 부패의 온상이다. 국세청 로비 의혹 사건도 밑바탕에 대학 동기라는 연줄과 스폰서 관계가 깔려 있다. 씨제이 쪽은 국세청 간부들이 사무관, 서기관일 때부터 술과 골프 접대로 꾸준히 관리해왔다고 한다. 스폰서 관계는 뇌물 사건으로 걸려도 대가성 입증이 어려워 무죄 받고 나온다.
김영란법은 우리 사회 특유의 병폐에 대한 맞춤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씨제이 사건에서 보듯 모든 게 연줄로 이뤄지고 상층부가 네트워크를 형성해 기득권을 나눠 갖는 카르텔을 이루고 있다. ‘대가성 없는 금품수수란 없다’며 그러한 카르텔을 깨자는 게 핵심이다. 초안대로 가야 충격효과와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19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금융실명제 실시 결심을 굳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과 야당이 찬성하는 김영란법 원안에 힘을 실어주면 큰 박수를 받을 것이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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