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언론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휴가 이야기 ‘저도의 추억’을 일제히 보도한 직후인 지난 3일, 서울 청계천광장엔 초저녁부터 수만명의 촛불시민이 모여들었다. 민주주의를 빼앗겼다는 국민적 공분이 촛불과 함께 여름밤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촛불광장의 열기는 저도의 감정이입과 정반대 방향으로 국민여론을 형성해 가고 있다. 그러나 수만명의 촛불집회와 제1야당의 장외 국민보고대회가 대통령의 휴가 이야기보다도 낮추어 보도되는 것이 지금의 언론구조다. 정상적인 국민여론 형성이 가능할 리 없다. 신문과 방송, 그리고 국가정보기관까지도 보수진영의 소속원처럼 충성하는 마당에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는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이날 여야 영수회담을 공식 요구했다. 대선 불복이나 선거 무효를 말한 적이 없다는 뜻을 누차 밝히기도 했다. 청와대는 여야의 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함께 만나는 5자 회담을 역제의했다. 민주당은 일대일 영수회담이 선행돼야 한다며 이를 거부했다. 5자 회담을 한 뒤 이어서 여야 영수회담 자리를 만들어 ‘5+2 방식’으로 양쪽의 제의를 모두 소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야 지도자들의 만남은 언제나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만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이날 같은 자리에서 열린 ‘국정원 대선개입 시국회의’의 촛불문화제에서는 대선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구호와 연설이 이어졌다. ‘박근혜 하야’ ‘박근혜 퇴진’과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것만 보더라도 청와대가 여야 영수회담을 안 한다면 우둔하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누리당은 민주당 지도부에 대해 대선 불복이냐면서 역공을 펴 왔다. 야당이 대선 결과에 불복하면 큰 죄악이라도 된다는 듯이 사뭇 협박조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려면 전제조건으로서 절차적 정당성이 충족돼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엔 눈을 감은 채다. 민주정치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들어낸 결과보다 합법적 절차와 과정이 더 중시된다. 훈련된 국가정보기관 요원의 조직적 댓글 달기와 같은 여론공작이 선거 정국에 가해졌다면 절차적 정당성은 궤멸되고 만다. 그것이 선거 무효까지 이르게 할 만큼 영향이 컸느냐 여부는 사법적 판단의 문제가 될지 몰라도 그것으로 절차적 정당성의 훼손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일단 민주적인 선거 과정을 훼손한 후보가 있다면 선거재판은 최소한 벌금형이라도 내리는 게 상례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투표 사흘 전 텔레비전 토론에서 “국정원 여직원이 댓글을 달았다는 증거가 없다”며 “민주당이 나를 흠집 내고 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한 모략”이라고 단언했다. 박 후보의 전 국민을 향한 이 발언은 허위였음이 이제 밝혀지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였다면 이에 대한 선거재판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 벌금형 100만원만 나와도 당선자는 의원직을 상실한다. 국회의원 자신들이 이것을 대통령의 경우와 비교해보아야 할 것이다.
‘저도의 추억’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그 추억이란 ‘대선 여론공작에 대한 박 대통령의 죄의식 없음’까지 함축했단 말인가. 김 실장은 널리 알려진 1992년 12월 부산 초원복집 사건으로 지역감정까지 이용해 대선 여론을 공작했던 장본인이다. 여론공작은 부정선거의 한 전형으로 이에 대한 재발 방지 없이 절차적 정당성을 보장하기란 불가능하다.
대선 결과의 정당성 여부는 국회의 국정원 국정조사와 원세훈 재판의 결과 등을 지켜본 뒤 말해야 한다. 국정조사는 또 여야의 정치적 논쟁으로 점철되기 때문에 거기서 더 불거지는 의혹들에 대해 특검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민주당 지도부가 에둘러 대선 불복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해도 최종 심판은 결국 민심동향일 수밖에 없다.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시사게이트#7-1] 막장에서 광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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