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규 정치·사회 에디터
대통령에게 정치의 광장은 번거롭고 불편한 곳이다. 야당과 대화하고 여당과 소통하며 여론도 살펴야 한다. 설득하고 타협하다 안 되면 양보도 해야 한다. 대통령 해먹기 쉽지 않은 곳이다. 통치의 성채에선 하명하면 이행하고 지시하면 보고가 돌아온다. 반대편과 어색한 만남을 안 해도 되고, 엇나가는 내 편 다독일 필요도 없다. 거리낄 것도 귀찮게 하는 존재들도 없으니 대통령 노릇 하기 쉬운 곳이다. 그러니 광장을 떠나 성채로 가고 싶은 것은 치명적 유혹이다. 이번 청와대 개편을 보면 대통령이 통치의 성채로 들어가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박준우 정무수석은 정치로부터의 이탈을, 김기춘 비서실장은 통치로의 이동을 상징하는 듯하다.
대통령은 박 수석에게 ‘대야 관계 등 국내 정무 분야도 국제 기준과 상식이 통하도록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정치 현장을 경험한 적이 없고 30년 동안 외교관 생활만 한 인물에게 정치의 선진화와 세계화라는 난제를 맡긴 셈인데, 대통령도 그게 가능하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정무수석을 새로 임명해 정치권과 한번 잘해보겠다는 게 아니라 국제 기준에 미달하고 상식도 통하지 않는 정치와는 거리를 둘 테니 당신들끼리 잘해보라는 것으로 비친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에서도 국회와 정치에 대한 조롱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박준우는 아무래도 정무(政務)수석이 아니라 정치 부재의 정무(政無)수석을 하게 될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시대의 청와대에서 보고 배운 건 정치가 아니라 통치였다. 유신정치가 아니라 유신통치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국회에서 5선을 쌓았다고 하지만 통치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게 각인된 그에게 정치는 어쩌면 낯설고 서툰 영역인지도 모른다. 광장에 선 대통령은 좋은 참모를 널리 찾지만 성채로 들어간 통치자에겐 자신의 뜻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이를 잘 이행할 충직한 하수인 한 명만 있으면 된다. ‘윗분’ 뜻 헤아리는 재주 있고 유신통치 법제화에 앞장서 통치라면 일가견이 있는 김기춘이니 통치자 수하의 1인자 노릇에 맞춤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 김기춘은 아무래도 비서실장에 머물지 않고 사실상의 부통령을 하게 될 것 같다.
여야 대표들과의 만남에 대한 대통령의 경직된 태도에서도 스스로를 통치자로 인식하는 관점이 엿보인다. 정치가 아니라 통치를 하기로 작정한 대통령에게 야당 대표의 양자회동이나 여당 대표의 3자회동 제안은 언감생심 불온하기 짝이 없는 얘기로 비칠 것이다. 대통령이 정무수석에게 주문했다는 정치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시비를 걸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잣대는 대통령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미국의 빌 클린턴은 1주일에 수십통씩 여야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설득을 시도했다. 공화당 의원들이 조지 부시에게서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전화를 버락 오바마한테서 받았다고 <뉴욕 타임스>는 보도한 적이 있다. 대통령이 야당 대표와 마주 앉는 게 그렇게 어렵다면 글로벌 스탠더드는 아직 한참 멀었다.
역대 대통령들도 정치의 광장과 높다란 벽을 쌓고 통치의 성채로 퇴행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건 대개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한 임기말 권력의 황혼녘이었다. 취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지금 박 대통령 지지율은 60%를 오르내리고 있고 여권은 분열되지 않았으며 야당도 위협적이지 않다. 정치를 벗어나 통치의 영역으로 가기엔 너무 이르다. 힘이 센 대통령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다. 벌써 정치가 아니라 통치를 하려 한다면 본인에겐 위험하고 국민에겐 불행한 일이다. 지금은 통치가 아니라 정치를 할 때다.
임석규 정치·사회 에디터 sky@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전두환 육사에 호쾌한 기부, 그러나 그것은 ‘빈틈’의 시작
■ ‘피서’ 대신 ‘촛불’ 든 시민들 “박 대통령 사과하라”
■ “화가 나면 샌드백 친다” 공포 못 느끼는 야수
■ [화보] 김정은, 평양, 금강산…지금 북한에선
■ [화보] 눈뜨고 못볼 4대강 후유증…깎이고 꺼지고
■ 전두환 육사에 호쾌한 기부, 그러나 그것은 ‘빈틈’의 시작
■ ‘피서’ 대신 ‘촛불’ 든 시민들 “박 대통령 사과하라”
■ “화가 나면 샌드백 친다” 공포 못 느끼는 야수
■ [화보] 김정은, 평양, 금강산…지금 북한에선
■ [화보] 눈뜨고 못볼 4대강 후유증…깎이고 꺼지고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