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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괴담 통치 / 이유진

등록 2013-08-25 19:15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며칠 전 지방의 한 모임을 방문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사람들이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 흘러나온 방사능 오염수 얘기를 꺼냈다. 한 어른은 “총리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개탄했고, 다른 이들은 “화내는 것도 포기했다”며 혀를 찼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이달 초 ‘일본 방사능 괴담’ 유포자를 처벌하라고 한 뒤, 22일 다시 한번 괴담 차단을 지시했다는 뉴스를 듣고서다.

덥다고 ‘공포 체험’을 따로 할 필요가 있을까. 삶 자체가 오싹하다. 몇년 전부터 우리는 매년 재난의 위협을 직간접으로 경험해왔다. 2008년 광우병 소고기 수입 논란, 2009년 신종플루, 2010년 구제역, 2011년부터 지금까지 일본 원전 방사능 유출 사태 등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방사능 피폭 공포가 으뜸이다. 전염병은 변종을 남길지라도 피해가 해당 세대로 끝나지만, 방사능 오염은 자손에게도 악영향을 끼친다. 박근혜 정부는 불량식품을 ‘4대 악’으로 규정한 바 있다. 식품이 방사능에 오염된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불량식품이 될 것이다.

주부들은 더 바빠졌다. 식품 방사능 검사를 꼼꼼히 하는 생활협동조합에 가입하고, 원산지 확인을 빼놓지 않는다. 휴대용 방사능측정기를 갖고 다니는 엄마들도 적잖다. 정부를 믿지 못하니 ‘내 아이는 내가 지킨다’며 나선 것이다. 이를 엄마들의 신경증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기도 했다. 2011년 서울의 주택가에서 ‘방사능 아스팔트’를 처음 찾아낸 것도 엄마들이었다.

엄마들의 이런 행동은 지난 몇년에 걸친 학습효과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광우병 논란과 신종플루 확산기에 적극적인 대처보다 ‘괴담 근원지’를 뿌리뽑겠다며 아이들이나 엄마들까지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수사를 벌였다. 박근혜 정부도 비슷하다. 위험에 대한 조기 ‘경보’는커녕 입조심하라는 ‘경고’를 먼저 보냈다.

그런데 웬걸, 이달 초 정부가 ‘괴담’을 공언하자 더 난리가 났다. 무관심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괴담이 뭐기에’ 하는 얘기가 터져나왔다. 괴담은 몰라도, 불안감이 고조된 건 맞다. ‘구글 트렌드’를 보면, 방사능에 대한 인터넷 검색률은 지난달 급증했다. 방사능 수증기와 오염수 해양 유출을 확인한 때와 정확하게 맞물린다. 국민 불안을 해결하는 건 뒷전이고, 괴담 운운하며 시간낭비 하는 건 아닐까 우려스럽다.

불안은 불신과 상호작용한다. 2009년 신종플루 발생 때를 보자. 정부가 국제기구의 권고기준만큼 백신을 확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폭로돼 늑장대응이라는 여론의 호된 질타가 쏟아졌다. 이번에도 ‘인접국가 방사능 누출 사고 매뉴얼’에 따른 위기경보를 발령하지 않고 직무유기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사실이라면 당연한 지적이다.

국가의 보호를 못 받는다고 느낀 사람들은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다. 주부들이 밤새 외국 사이트를 뒤져가며 정보를 얻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들의 절박한 행위를 ‘이상행동’ ‘신경증’으로 몰아가는 얘기들이 곧 나올 것이다. ‘반국가세력’ ‘반정부세력’이라고 규정할지도 모른다. 반복돼온 통치전략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국가권력이 상황에 대한 결정권을 독점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불신하는 이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면서 배제해야 정부는 정상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권위를 보전할 수 있다. 괴담을 구실로 한 공포정치가 익숙한 통치방식일지는 모르나 이는 불신을 키운다. 그 어느 정권보다 ‘신뢰’를 강조해온 박근혜 정부가 아닌가. 취임 6개월을 맞아 높은 지지율에 걸맞은 돌봄의 정신을 찾고 지혜롭게 대처하길 바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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