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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명수의 사람그물] 후광효과가 판치는 사회

등록 2013-09-02 19:27수정 2013-12-16 16:08

이명수 심리기획자
이명수 심리기획자
‘그게 말이냐 막걸리냐’라는 말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속설이구나 싶었다.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변호인이 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랬다. 그 주장은 너무 원색적이라서 어린아이의 투정 같기도 하고 술 취한 이의 횡설수설 같기도 하다. “명문대에 외무고시를 패스하고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몸담아 경찰청장까지 한 사람의 말이 거짓말이겠느냐.”

여기에 무슨 논리적 인과관계가 있고 최소한의 상식적 판단이 있나. 없다. 내게는 그것이 법적 논리로 무장해야 하는 변호사의 무지거나 무리수라기보다 자기들끼리만 은밀하게 주고받아야 하는 속마음을 엉겁결에 까발린 결과처럼 느껴진다.

어떤 이들에겐 티코와 벤츠의 접촉사고가 났을 때 무조건 티코가 잘못했을 거라는 선입견이 작동한다. 벤츠 운전자가 그 비싼 차를 가지고 자기 손해 나는 짓을 했을 리 없다는 예단이 있어서 그렇다. 물론 막걸리에 가까운 말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 궤변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사회가 후광효과가 판치는 곳이라서 그렇다. 하나의 도드라진 특성이 여타의 특성을 무력화시키는 후광효과의 논리적 오류가 그 자체로 현실이 되는 상황을 너무 많이 보고 살아서 그렇다.

동서끼리 모였을 때 좀더 출세하고 돈 많은 이의 말발이 자녀교육, 정치성향, 삶의 가치관 등 모든 영역에서 우위에 서는 것처럼 돈과 성공이 일정 규모 이상이면 다른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개별적 인간은 휘발되고 돈과 성공이 모든 것의 잣대가 된다.

몇년 전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가 사면받은 재벌회장의 일성은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였다. 자기는 돈도 많고 나라를 부흥시키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므로 정직하지 않은 일을 할 리가 없다는 셀프 후광효과가 체질화한 느낌이다. 그러니 교묘한 방법으로 세금을 떼어먹은 당사자가 다른 이에게 정직 운운하며 대놓고 훈계질할 수 있는 것이다. 일부 언론은 그 재벌회장에게 사람이 정직하게 살 수 있는 지혜를 묻기까지 한다.

한 영화에서 부인에게 외도 현장을 걸린 바람둥이 남편이 너무 다급해서 이렇게 외친다. “여보, 당신 눈을 믿어 나를 믿어?” 물론 눈을 믿는 게 맞다. 하지만 저런 부류의 천연덕스러운 궤변이 이어지면 또 일부 사람들이 그 궤변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면 자기 감각에 이상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후광효과나 스펙에 의존하게 된다. 모든 촉수가 그리로만 향한다. 불안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럴수록 자기감각은 퇴화되고 자기를 믿을 수 없게 되며 작은 일에도 불안이 커져서 또다시 스펙에 매달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실업 상태에서 불필요한 자격증이라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면 무엇이라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일시적으로 불안이 줄어든다. 하지만 실업을 탈출할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스펙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다고 나는 느낀다.

특히 사람 문제에서는 그런 경향이 일상화된 느낌이다. 스펙이 좋으면 모든 게 끝이다. 한줌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뻔한 궤변인데도 발화자의 스펙을 강조하면서 믿으라고 강변한다. 한술 더 떠 그게 현실이어야 한다고 강요까지 한다. 진실도 힘 있는 자들이 정하고 악도 힘이 있으면 정의가 된다고 우기는 격이다.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출세했더니 키가 커졌다는 식의 논리적 오류가 명백한, 막걸리 같은 말이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사회가 정상일 수는 없다. 후광효과가 아니라 인간의 개별성을 바탕으로 묻고 따질 수 있어야 한다. 후광효과에 의존하는 사회는 신기루 사회다. 결국 무너진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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