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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수필가 박근혜 / 최재봉

등록 2013-09-09 18:24

경주 남산 자락 화랑교육원에 입소한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1979년 가을이었다. 국궁 체험과 답사 등 여러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게 ‘명상 시간’이었다. 입소생들은 아침이면 너른 강당에 모여 앉아 눈을 감은 채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말씀을 들었다. 은은한 음악을 배경에 깔고 성우의 목소리에 실려 강당 안에 흐르던 그 ‘말씀’은 다름 아닌 박정희 대통령의 어록이었다. 이제 와서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숙연하다 못해 종교적 고양의 느낌조차 주었던 강당 안의 공기만은 지금도 생생하다.

일주일의 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직후 10·26 뉴스를 접했다. 화랑교육원에서 흠모의 대상으로 한껏 추어올렸던 인물이 수하의 총질에 스러졌던 것. 어린 학생에게는 우주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현대문학> 9월호에 실린 박근혜 대통령의 수필과 그에 대한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의 비평을 읽자니 화랑교육원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꽃구경을 가는 이유’ 등 잡지에 실린 박 대통령의 수필 네 편은 그가 1998년에 낸 책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에서 발췌한 것이라 했다. 이 글들에 대한 이 교수의 평은 거창하기 짝이 없다.

“박근혜의 수필은 우리 수필 문단에서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일상적인 생활 수필과는 전혀 다른 수신(修身)에 관한 에세이로서 모럴리스트인 몽테뉴와 베이컨 수필의 전통을 잇는다고 할 수 있다. (…) 실로 그의 에세이의 대부분은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정말 지나침이 없는가. 그가 “작가의 동의를 구해” <현대문학>에 재수록했다는 박 대통령의 수필들은, 딱히 그른 말은 아니라 해도 자기만의 사유와 통찰을 보여주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 평범하고 지당한 ‘말씀’으로 읽힌다. 이 말씀과 그에 대한 지나친 상찬이, 지난 시절 화랑교육원에서 들었던 그 말씀을 떠오르게 한 것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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