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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언론과 공사판의 공통점 / 한귀영

등록 2013-09-17 17:18수정 2013-09-19 00:13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이명박 정부 시절 김은혜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미다시’라는 일본어 표현을 사용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2010년 5월 언론이 엠비(MB)의 촛불발언을 부정적으로 보도했는데 이를 두고 “임의로 없는 말을 대통령 말이라고 미다시 잡아서 쓰면”이라며 거칠게 비판했던 것이다. 청와대 대변인쯤 되는 이가 함부로 말을 뱉었을 리는 없고, 기자들만의 업계용어를 사용했을 때는 자신도 언론사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듯하다.

국립국어원에서 낸 국어순화자료집합본(1991~2002)에 따르면 일본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곳은 건설 현장과 신문제작업으로 각각 410단어, 145단어나 된다. 건설 현장의 경우 하시라(기둥), 하리(보), 렝가(벽돌), 고대(흙칼) 등 낯선 단어도 있지만 현장식당을 의미하는 함바와 같이 익숙한 단어도 있다. 언론판에서 자주 사용되는 일본어로는 사쓰마와리(경찰서 순회), 야마(요지), 미다시(제목), 우라까이(베끼기) 등이 있는데, 일반인들은 도통 뜻을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건설 현장도 문제지만, 명색이 언중의 말글살이에 지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언론계에서 일본어 단어들이 공공연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부조리하다.

사실 공사판과 언론판 사이에는 큰 공통점이 있다. 대체로 수직적 위계, 상하 복종관계가 강한 권위주의적 내부문화를 갖고 있다. 건설노동자들은 발주처-원청-하청-재하청-십장-일용노동자로 이어지는 거친 위계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명하복의 수직적 주종관계를 익힐 수밖에 없다.

언론판은 어떤가? 입사연도로 선후배 간 위계를 엄격히 따지는 기수문화는 소속 언론사를 넘어 다른 언론사들로까지 확대되어 있다. 기자들이라면 소속사에 관계없이 선후배의 수직적 위계 속에 위치하는 셈이다. 오늘날과 같이 언론사 간 갈등이 극심한 시기, 기수문화는 내부로는 엄격한 위계를 바탕으로 직업적 유대를 강화하고 외부와는 단단한 경계 긋기의 기능을 수행하곤 한다.

물론 공사판과 언론판 사이에는 사회적 지위 면에서 시쳇말로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의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공사판 일용건설직들의 일본어 사용에서 거칠면서도 짠한 주변부 하위문화의 느낌을 받는다면, 언론판의 일본어 남용에서는 시대착오적이면서도 오만한 중심부 폐쇄문화의 느낌을 받게 된다.

언론계가 엘리트인지, 중심부인지 여부는 별개로 하자. 아무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본어 업계용어의 남발은 민족주의적 분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연민이나 조롱의 대상에 가깝다. 일본 관련 업무가 아닌 한 현대 한국에서 일본어 혼용은 후진적이거나 오타쿠적(이상한 것에 열중하는 행위)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채동욱 검찰총장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는 후진성 또는 오타쿠성의 단적인 사례다. 공직자의 혼외자식 문제가 공익, 국민의 알 권리와 얼마나 큰 관련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논외로 하자.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획득한 것도 모자라 의혹에 불과한 것을 사실로 호도하는 작태, 권력을 견제해야 할 언론이 권언유착을 넘어 권력의 대리전을 치르는 듯한 모습은 퇴행과 후진성 그 자체다.

연예인 성상납 등 파렴치한 사안에 사주 일가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일었을 때는 사력을 다해 은폐하고자 하던 언론사가, 권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의혹은 국가존망의 중대사라도 되는 양 대서특필한다. 오타쿠의 특징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이다. 오타쿠에게 결여된 것은 균형감각이다. 개인, 오타쿠라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언론이 오타쿠짓을 하면 나라가 불행해진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hgy4215@hani.co.kr

‘채동욱 파문’과 ‘유신 검찰’의 그림자 [#167- 성한용의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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